(38)가좌동 청송 심씨 가옥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0-22 21:58:01
300년 역사 ‘인천 최고령 집’
(38) 가좌동 청송 심씨 가옥
지난주에는 개항 당시 독일 상사(商社)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사원이었던 헨켈의 중구 송학동 저택, 즉 전 우련통운 사장 배인복(裵仁福)의 집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가좌동 청송 심씨(靑松沈氏) 가옥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헨켈 저택이 100여 년 역사의 사라진 양관이라면 서구 가좌동 280의 3에 앉은 청송 심씨 이 구옥은 300년 역사를 가진 인천 최고령의 집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고가(古家)로서 법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집으로는 중구 남북동의 시 문화재 자료 제16호인 ‘조병수 가옥(趙炳洙家屋)’이 있는데, 이 집은 18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집은 청송 심씨 영의정 안효공(安孝公) 휘(諱) 온(溫)의 10대손,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증가선대부이조참판(贈嘉善大夫吏曹參判) 심공(沈公) 한웅(漢雄, 1652~1715)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1940년 심공 한웅의 8대손 심공 상필(相弼, 1873~1957)과 그의 자 심공 운섭(雲燮, 1899~1966)이 4년 간에 걸쳐 증축 공사를 했다.
이분들은 이 공사를 위해 백두산에서 한국송(韓國松) 재목을 벌채해 압록강 신의주까지 뗏목으로 운송했으며 지붕의 기와는 서해 영흥도에 있었던 병자호란시의 충신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사당이 오랜 풍상으로 퇴락해 헐리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와를 배 3척으로 운반, 이 집의 기와로 삼았다.”
이 글은 1978년 10월3일 당시 청송 심씨 참정공파(僉正公派) 회장이던 심재갑(沈載甲)씨 등이 기록한 이 집에 대한 찬문(撰文)의 일부로 단편적이나마 이 고가의 역사와 내력을 알려 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1950년 6·25가 터져 인천시민 수만 명이 개건너 나루를 건너 가좌동 일대로 피난해 왔을 당시 이 집에 무려 30여 가구가 들어와 생활했는데 이 집 우물이 마르지 않아 피난민들의 극심한 식수난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 우물은 현재도 보존돼 있다.
그 후 1950~60년대에는 인중, 제고 길영희(吉英羲) 교장 선생의 주도로 인중, 제고생은 물론 서울고교, 인일여고, 송도고교 학생들의 특별활동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때 특별활동이 문맹퇴치운동, 가재울야학당 운영, 브나로드 운동, 사방사업, 근로봉사, 학급 야영 등이었다.
이 구옥에 얽힌 이야기로 1969년 10월 정부가 농어촌에 전기를 공급하는 공사를 추진할 때, 서곶지역 전기추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심재갑씨가 김정렴(金正濂) 당시 상공장관을 초청해 회의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집을 거점으로 해서 서구 전 지역의 전기 공급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이 유서 깊은 구옥이 이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경인고속도로 직선화 사업의 여파로 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이 그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데, 그냥 아무 보호 대책 없이 사라질 운명이라니 정말 당혹스럽다.
심씨 문중에서는 서구 공촌동의 ‘심즙신도비’ 인근으로 이전 복원하려 하나, 이 신도비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2호여서 현 규정상 문화재로부터 200m 이내에는 건축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규정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인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이처럼 오래되고 보존이 잘 된 옛집을 그냥 헐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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