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인천 야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1-02 19:10:02
최초 자생팀 漢勇團 ‘웃터골 전설’
(40) 인천 야구
인천 야구가 졌다. 지난 10월24일, 인천 연고 야구단 SK와이번스 팀이 연달아 12전을 싸운 끝에 6승을 거두고 챔피언 트로피를 상대에게 내주었다. 준우승이다. 3년 연속 우승을 놓친 마지막 투수 채병용 선수의 분함과 아쉬움의 눈물이 아직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그러나 잘 싸웠다. 차포(車砲)를 떼고도 이룬 준우승!
그들은 최고의 인천 야구를 보여주었고, 유감없이 명승부를 펼친 것이다. 정말 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전에 이미 그들은 팀 19연승이라는 아시아 신기록을 쌓지 않았던가. 이것이 인천 야구의 본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김성근 감독과 선수단 전원, 특히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마운드의 채 투수, 다시 한 번 당신들, 정말 잘 싸웠다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 인천이 가진 무형의 자산 중에서 뭐니 뭐니해도 야구에 대한 자존심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인천은 한국 최고(最古)의 야구 역사를 가진 데다가 팀도 자생적으로 생겨난 곳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1899년 이미 인천영어야학교에서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1920년대 일본팀을 누르고 민족의 울분을 발산하던, 다른 시도에서는 볼 수 없는 자생팀 한용단(漢勇團)의 ‘웃터골 전설과 역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자연발생적인 열기와 깊고 깊은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요즘 응원단에서선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기록은 한용단 야구팀을 통한 당시 인천 사람들의 감정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이 야구단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학생들 스스로가 주동이 되어 조직한 학생팀이었다.
전 민의원 의장 곽상훈(郭尙勳)이 단장이 되고 배재고보의 최영업(崔榮業), 이수봉(李壽奉), 장건식(張健植), 박태성(朴泰星), 박안득(朴安得) 등과 중앙고보의 김영길(金榮吉) 그리고 이기만(李基萬), 이백수(李白水) 등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서울 외에는 야구를 아는 사람이 없던 시절’에 이미 인천에 야구의 뿌리를 내려 ‘야구 인천’ ‘구도 인천’의 전통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그 후 한용단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고 대신 고려야구단으로 재발족해 배재의 이수봉, 지성룡(池成龍), 석연봉(石連奉), 김태봉(金泰奉), 장귀남(張貴男), 중앙의 박칠복(朴七福), 김수영(金壽永), 김영길(金榮吉), 휘문의 강세희(姜世熙), 철도국의 윤삼룡(尹三龍), 경전의 이재순(李在淳)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팀들을 누르고 우승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 한큐(坂急)브레이브스 출신 유완식(劉完植), 연전 투수 박현덕(朴賢德), 갑자원대회 출신 인천고 선수 김선웅(金善雄), 장영식(張榮植)과 박근식(朴根植), 심연택(沈連澤), 이연구(李淵九), 유인식(劉仁植), 한득봉(韓得鳳), 이용국(李龍國), 한광희(韓光熙), 홍병창(洪丙昌) 등이 인천팀을 조직해 1947년 인천 서울, 부산, 대구 4도시대회와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전국체전에서 모조리 우승하는 기록을 세워 인천 야구의 위세를 전국에 떨쳤다. 그 외에도 박현식(朴賢植), 서동준(徐東俊), 김광택(金光澤), 주세현(朱世鉉), 진원주(陳元柱), 이기상(李起祥), 한학수(韓學洙), 김진영, 신인식(申仁植), 조한수(趙漢秀) 같은 불세출의 스타들이 인천 야구의 영광을 이어왔다.
오늘날 야구장 하나 제대로 없이 인천 ‘아마야구’는 다소 침체에 빠진 것이 사실이지만 SK의 쾌거를 기회로 ‘야구도시 인천’의 자존심 재현을 기대해 본다.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 인천을 노래한 시들 (1) | 2023.06.05 |
---|---|
각흘도의 참식나무 (0) | 2023.06.04 |
(39) ‘인천 한 세기’ (0) | 2023.06.04 |
(38)가좌동 청송 심씨 가옥 (1) | 2023.06.04 |
(37) 헨켈 저택과 배씨 일문 (0) | 2023.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