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헨켈 저택과 배씨 일문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0-13 13:33:01
자유공원 자락 벽돌양옥… 뛰어난 조망
(37) 헨켈 저택과 배씨 일문
“이 집의 건축 연대는 1895년 전후로 추산된다. 그 까닭은 ‘월터’씨의 뒤를 이어서 한국에서 결혼한 마이야 양행 사원인 독일 청년 ‘뤼르스(Luhrs)’가 그들의 신접살림을 위해서 신축했는데 외관상 수려한 멋은 찾아볼 수 없으되 어디까지나 질소(質素) 견실한 단층 벽돌 주택으로서 오직 조망(眺望)만이 각별했다. 그 뒤 어느 때부터였는지 역시 ‘월터양행’의 간부 사원 헬만 헨켈씨가 거주했는데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 ‘안나 헨켈’은 남은 재산을 감꼭지 빼어먹듯 소진해 일정 말기에 이르러서는 퍽이나 영세하여졌고 또한 노래(老來)로 한층 짙어지는 사고무친의 고독감과 제2차 대전에서의 조국 독일의 패배 등으로 인해 유일한 재산인 가옥을 방매하고, 인천을 떠나려 하였건만….”
고 최성연(崔聖淵)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에 실린 이른바 ‘헨켈 저택’에 관한 내용이다. 이 집은 이후에도 헨켈 부인과 한국인 김모 여인과, 또 김 여인과 인천 천주교회와의 2중, 3중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결국 김 여인이 승소를 해 소유했다고 하나 6·25 전쟁 통에 폭격을 맞아 한 동안 “벽면과 굴뚝만이 허공을 떠받들고” 있었다.
이 헨켈 저택은 중구 송학동 1가 2번지, 자유공원 동쪽 조류사 방향으로 오르는 긴 계단 맨 끄트머리께,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의 내력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다시 아담한 양옥 건물로 재건돼 여러 해 전에 타계한 고 배인복(裵仁福) 우련통운 사장의 자택이 되었다. 그리고 근래, 얼마 전부터는 공가(空家)가 되어 있었다.
“늘 양지바른 남쪽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이 집이 추석 연휴 다음날인 지난 10월6일 마침내 헐리고 말았다. 맞은 편의 제일교회가 매입하여 교회 부속 시설로 쓸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거대한 크레인 앞에 삽시에 흔적도 없이 먼지가 되고 만 그 현장을 우연히 목도하면서 문득 이 집 주인이었던 배인복 사장과 더불어 인천의 한 명가(名家), 배씨 일문에 대한 생각이 났던 것이다.
단편적이지만 고 배 사장은 ‘1956년 중구 해안동 4가 2에 주업종이 운수창고업인 협동운수(協同運輸)’를 창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앞서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 인천지국 총무였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무튼 그는 ‘보성전문 재학 중 럭비선수로 전 일본대회를 석권, 명 포드센터로서 보전팀 주장을 맡아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명선수였다’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기록도 있다.
이 가문에는 특별한 인물로는 배인복 사장의 계씨이자 ‘흑인시’로 유명했던 고 배인철(裵仁哲)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는 일본대학 영문과를 나와 인천중학교 영어교사와 해양대학교 영어교수를 지냈다. 1945년에는 신예술가협회(新藝術家協會)라는 문학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 ‘신예술’을 발간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이유가 분명치 않은 총격을 받고 요절하고 말았다.
그밖에 현재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기업 우련통운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배인흥(裵仁興) 사장과 전 인하대학교 교수였던 배경숙(裵慶淑) 여사가 다 그의 형제간이다.
인천의 옛 인물과 옛 흔적이 이렇게 쉬이 사라지는 것이 참으로 속절없다는 생각을 이 가을, 한 인천 토박이가 하는 것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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