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제물포구락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9-22 02:48:07
개항기 서양인·일본인들 사교장
(34) 제물포구락부
그래도 지금은 제물포구락부(濟物浦俱樂部)가 어디라는 것을 아는 시민들이 많아진 것 같다. 자유공원 산책을 나왔다가 발길 닫는 대로 들러 아는 관람객들도 있지만, 인천문화원연합회가 운영을 맡아 크고 작은 행사들을 개최하면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는 ‘문학콘서트’가 열려 백여 청중이 ‘초가을 저녁 한 때에 흐르는 문학과 음악의 향기’에 흠뻑 젖기도 했었다.
제물포구락부는 중구 송학동 1가 11의 1 자유공원 비둘기광장 남쪽 계단 아래에 있는 양관(洋館)이다. 1883년 개항이 되고 인천은 중구 중앙동을 중심으로 일본조계, 선린동을 중심으로 청국조계, 그리고 자유공원 일대의 14만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 각국조계가 설정되었는데, 이 각국조계에 거주하던 미국, 독일, 러시아, 불란서, 영국 등등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이 사교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건축한 회관이다.
이 건물은 지붕을 함석으로 덮은 벽돌 2층 건물로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친이라는 사람이 설계해 1901년 6월 22일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내부에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있었고, 근처에 테니스 코트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화로운 시설이었다. 저 아래 제물포 항구와 붉게 떨어지는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명당에 자리잡은 제물포구락부는 알려진 대로 사교장 역할뿐만 아니라, 인천을 기반으로 자국의 이권을 챙기려던 서구열강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기도 했던 곳이다.
경술국치 이후 조계(租界)들이 철폐됨에 따라 이 건물은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재향군인인천연합회가 사용했고, 그 후 1934년 이래 일본부인회관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 미군 사병구락부로 쓰이다가 1952년 7월에 인수해 이후 1990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돼 인천의 문화 인프라 구실을 했다. 한때 인천시의회와 인천시교육원이 회의실과 사무실로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중구 내동에 살았던 탓에 일고여덟 살 무렵, 동네 아이들과 자유공원 일대에 자주 올라와 제물포구락부 건물 근처에도 몰려가 보곤 했는데, 물론 박물관이란 이름도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썩 선명하지는 않아도 처음 기억은 대체로 어둑하고 음산한 음화(陰畵)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훗날 다시 박물관에 와서 인상 깊게 본 것이 거대한 맘모스의 상아와 송나라 때 주조되었다는 철제 범종이었다. 이 범종은 일제가 전쟁 말기 부족한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부평 군수공장 용광로에 넣으려 했던 것으로 패망과 더불어 미술평론가 이경성(李慶成) 선생이 재빨리 이리로 옮겨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밟고 내려와 이곳을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은 1960년 중학교 1학년 시절,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한 때부터였다. 이 건물은 공원 위쪽에서 보면 지하이고 인천시역사자료관 쪽에서 보면 1층인, 현재 인천문화원연합회 사무실 오른쪽 끝 방에 보이스카우트 인천연맹 사무실이 들어 있었다.
처음 외국인들의 사교장 겸 회의소로 문을 열어, 곡절을 겪다가 인천상륙작전 포화에도 인근 일대의 건물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렇게 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이 건물의 운명이었는지…. 근래 다시 옛날 회원국이었던 나라별로 행사를 가지는 등, 국제 교환장(交驩場)과 문화 홀(hall)로서 인천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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