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요와 왜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10-06 23:21:05
양요와 왜요
조우성의 미추홀
지난달 하순 어느 날, 인천에서 발간되는 4개 일간지가 약속이나 한 듯이 1면 톱으로 전한 뉴스가 있었다. 제호 바로 밑에 큼직하게 컬러 사진을 쓴 것이나 두세 줄의 설명을 달고 있는 게 모두 같아 의아했다.
인천관광공사가 '인천 방문의 해'를 맞아 138년 전인 1871년 강화 광성보에서 벌어진 '신미양요'의 전투 장면을 재연했다는 게 캡션의 내용이었다. 사진은 '조선군과 미군'이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혹자는 이를 일러 '조미전쟁(朝美戰爭)'이라고 하지만 국사 교과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고수하고 있다.
국가 간의 총력적 전쟁 수준은 아니었다는 해석인 것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도 그런 선상에서의 인식이다.
그런데 유독 1875년 일본이 영종도 등에서 저지른 군사적 만행은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이라 칭하고 있다.
'전쟁'이나 '요'가 아닌 '사건'으로 칭한 것은 의도적인 게 아니라 우발적이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가 강점기 내내 '운양호 사건'을 역사 용어로 써 왔다는 것은 이 단어가 식민지 사관에 부합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최근 이를 새롭게 인식하자는 뜻에서 대두된 신조어가 '을해왜요(乙亥倭擾)'이다.
물론 국사편찬위원회, 국어연구원, 전문 학자들의 1차적 이해와 언중(言衆)의 묵시적 동의 등이 있어야겠지만, '운양호 사건'을 역사 용어로 아직 쓰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을해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요'란 뜻이니 사실(史實)에 어긋남도 없어 보인다. 향후 이 용어의 귀추가 주목된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