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우성의 미추홀

월미성 재현 

by 형과니 2023. 6. 4.

월미성 재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10-27 18:29:57


월미성 재현 
조우성의 미추홀


'월미도'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숙종 21년(1695) 때이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얼굴을 보인 '어을미도(於乙味島)'가 그것이다. 민간에서 불리던 섬 이름 '월미도'를 향찰식으로 표기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때 '월미'의 '미' 자를 꼬리 '미(尾)'가 아닌 맛 '미(味)' 자로 쓴 것을 보면,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처럼 길게 휘어져 그렇게 불렀다"는 '달꼬리 설(說)'은 후세들이 갖다 붙인 문학적 수사였으리라 여겨진다.


'어을미도'가 '월미도'로 바뀌어 나타난 것은 숙종 34년(1708)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홍명하가 행궁을 인천과 월미도에 설치하기를 건백(建白)하였습니다(洪命夏建白, 設行宮於仁川與月尾島)"는 것이 그것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도 자신의 지도 '청구도(靑丘圖)'에 '월미도'란 지명을 최초로 표기하고, 더불어 홍명하가 설치를 건의해 세운 '행궁' 자리를 표기해 월미도가 유사시 임금의 피난 루트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월미도에 '성(城)'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북성(北城)'은 월미도 건너편 해안에 있었고,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도 '성지(城池ㆍ성과 연못)' 항목에서 오직 '문학산성(文鶴山城)'의 존재만을 밝히고 있다.


애초 월미도에 '성(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의 발상인진 몰라도 시가 200억 원이나 들여 '짝퉁 전통공원'에 이어 있지도 않았던 '월미성(月尾城)'을 재현하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역사 날조도 유만부동이다. 인천의 상징인 문학산성(文鶴山城)은 방치한 채 가짜 '성(城)'을 쌓을 수는 없다. /객원논설위원

'조우성의 미추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물관 100년  (0) 2023.06.04
인천 '정명 600년'   (0) 2023.06.04
양요와 왜요   (0) 2023.06.03
월미산 케이블카   (0) 2023.06.03
약학대  (0) 2023.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