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곳 애관극장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3-06 12:57:11
그때 그곳 애관극장
전망차자가 애관극장에 처음 들어가 본 것은 해방직후였다. 지금 스토리도 제목도 기억에 없지만 ‘월하의…’ 무엇이라고 했든가 아마도 엄한 시집살이 새댁이 자결하는 가정비극이었던 같다. 그 때로서도 퍽 오래된 무성영화였다. 당시 어린 것들은 또래들과 허름한 곳을 비집고 몰래 들어갔었는데 그러면서 도둑 입장을 큰 모험 처럼 여기고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무질서하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 만큼 애관극장은 허술했었다. 출입구는 용동쪽으로 무대는 오늘과 반대였었다는 기억이다. 처음 지어질 때 창고 같은 벽돌집이었다고 하니 그럴만도 했겠다. 애관극장이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895년 정치국씨에 의해 협률사라는 이름으로였다. 시역사자료관 강덕우 전문위원에 의하면 ‘협률(協律)’이란 뜻이 ‘음악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란 의미로서 부서의 이름이요 공연인 공연단체를 일컫는 언어였을 망정 사설극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인천에 상설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이 협률사가 1911년 축항사(築港舍)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는데 그 때 함세덕 정진 등 인천출신의 작가 연기자 등이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 다시 명칭을 오늘의 이름인 애관(愛館)으로 바꾸게 된다. 이것을 일본 발음으로 ‘아이강’이라고 하여 극장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훗날 동인천 역전에 개설한 어린이 전용 인영극장을 ‘고도모 아이강’-어린이 영화관-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싸리재 고갯길에 위치한 오늘의 건물은 6·25 때 불탄 자리에 새로 짓고 그 후 다시 개축한 것이다. 벌써 80년대말 영화관의 사양화로 몸부림하느라 몇 번 개축하고 1989년에는 70㎜ 대형 영사기에다 입체음향의 시설을 했어도 여전히 힘겨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가 보다. 인천신문의 ‘인천의 그곳’ 기획물 시리즈에도 애관극장의 형편을 소개하고 있다. 하긴 애관극장의 고군분투는 영화관 모두의 어려움이다.
얼마전에도 서울의 영화학 교수가 애관극장의 근황을 물어왔었다. 그는 전망차자의 신문사 후배였는데 통화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던터였다.
'오광철의 전망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어새 둥지트는 곳 (0) | 2023.06.09 |
---|---|
협궤선 복원 (0) | 2023.06.09 |
만인부동 종생불변 (0) | 2023.06.08 |
자존심 상하는 일 (1) | 2023.06.07 |
우주마가 되어 오다 (0) | 202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