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동 배과수원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5-25 14:26:56
수산동 배과수원
남동구 수산동은 1977년 도림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인천부 남촌면 지역으로서 현재 서창교차로에서 시내로 들어서는 제2경인고속도로 북쪽과 만수3지구 건너편에 위치한다. 원래 바릿대 형국의 산이 있으므로 바리미 바래터 배래터 비렷 혹은 발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웃 몇개 지역을 병합하여 발산리라 하여 1940년 인천부역 확장으로 비로소 인천시 관내가 되었다.
바릿대 혹은 바리때라함은 스님들이 사용하던 나무 그릇이다. 발우라고 해서 스님이 가지고 밥을 빌러 다니는 것을 탁발이라고 했다. 동남아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금속 발우가 아니라 나무로 만드는데 대추나무 단풍나무의 크고 작은 통나무를 토막내어 속을 파 여러개 만들어 겹으로 포개면 한벌이었다. 스님마다 이것을 깨끗하게 소중히 간직하며 여기에 밥과 국 김치를 나누어 담는다.
한편 수산동에는 몇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조말 한양에 살던 사람이 이곳에 자주 드나들다가 명당을 발견, 거기에 묘를 쓰고 싶었으나 마을 사람들 몰래 할 수가 없었다. 묘안을 찾아낸 그는 남사당패를 불러다 낮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그틈을 타 산소를 썼다. 며칠이 지나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공짜로 남사당놀이를 즐긴 탓에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당으로 인한 복은 없었다고 한다.
어느때였던지 발산리 마을에 부자 세집이 있었는데 시샘을 하느라 서로 다투었다. 그들은 더 부자인것을 나타내기 위해 노적가리를 높이 쌓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노적가리가 얼마나 높았던지 그 위에서 서로의 집안을 넘겨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수산동 일대의 등성이마다 골짜기마다 배꽃이 활짝 펴 화사하다. 개화기가 저온현상으로 늦어졌지만 인공수정에 바쁘다. 예전의 숭의동 일대 배나무밭들이 시가지 확산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수상동 일대에 겨우 명맥을 이을 정도이다. 지금도 몇몇 음식점들로 시끌시끌한데 머잖아 수천가구의 ‘보금자리’와 아시안게임 보조경기장들이 들어서면 그나마 형편이 어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