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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변화의 큰 걸음

by 형과니 2023. 6. 12.

변화의 큰 걸음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5-03 22:48:19


 

변화의 큰 걸음

 

1945년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그해 10월7일-서울 보다 앞서 인천에서 신문이 창간됐다.

그것이 대중일보이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그나마 1면이요, 뒷면은 백지였다. 한달후 2면 체제가 완비되고 그후 기사 10단에 광고 2단의 신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2009년 간 ‘인천언론사’는 적고 있다.

타블로이드판이란 신문의 크기를 말하며 일반신문 절반 크기의 소형신문이다. 오늘날 아침 지하철역 주변에서 살포되는 무가지 크기인데 대개 학교신문 기관지 사보등에 많다. 원래 타블로이드(tabloid)란 기사를 요약하며 사진이나 그림을 반페이지 크기로 다루는 등 대중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신문을 의미했는데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사진과 헤드라인을 크게 다루었다.

참고로 1896년 4월 7일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효시인 독립신문의 크기는 가로 22㎝, 세로 38㎝의 4면으로 격일간이었다. 그러니까 타블로이드판에 비교하면 폭이 약간 좁았던 셈이다. 한편 개항된 인천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발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조선순보·조선신보의 전신) 역시 소형신문이었던것 같다. 일본인 아오야마가 저술한 ‘인천사정’은 이를 일러 “유감스럽게도 지면이 적고 또 발행 횟수가 너무 적어 가격이 다소 비싸다”고 적고 있다.

1960년대초 인천의 신문들은 본문 10단에 광고 5단등 15단의 2면이었다. 전지를 절반 접으면 신문의 4개 면이 된다. 오늘날 A4용지의 4배 크기이다. 그러다가 1963년 4면이었다. 당국의 신문사 시설기준에 따라 윤전기를 가동하는 등 비로소 신문다운 신문이 됐다. 그후 신문사가 통폐합되고 6,29선언 이후 인천에서 신문사들이 창간하면서 점차 20면이 됐다.

신문의 면 수는 신문사의 사세와 비례하는 것으로 평가하며 경쟁에 따라 면 수가 증가한다. 그러나 내용이 충실해야지 면수가 좌우하지 않는것은 물론이다. 본보가 감면했던 지면을 다시 20면으로 복귀했다. 지면에서도 밝혔듯 증면과 함께 알찬 내용으로 질적 발전을 다짐하고 있다. 오직 변화의 큰 걸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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