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5-31 15:35:49
“제가 1961년 KBS 청탁으로 작곡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북쪽 어느 하늘아래 살아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생각하면서 작곡했으니 노래가 애절할수밖에 없었다는것을 이제 지면에 처음으로 밝혀둡니다. 어쩌다 금후라도 만나게되면 이미 서로가 70세를 넘은 노경의 해후라고 생각하니 세삼 공산주의 이념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았나 하고 강하게 느껴집니다.”
작곡가 최영섭씨가 2004년 신문에 연재한 ‘음악이야기’에서 밝힌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 뒷이야기이다. 그는 학생시절 독서회에서 한 여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난 이틀 뒤 만난 그녀는 이런날이 오리라 알고 있었다면서 부르조아적 정신을 버리고 새로운 인민예술가로서 헌신할때가 왔다며 설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무신론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일할수 없다고 거절했다. 수복된 후 그녀는 고향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애창곡 ‘그리운 금강산’은 한상억 작사에 최영섭 작곡의 가곡이다. 두분은 강화도 출신으로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향마을은 다르더라도 두분 모두 강화군 온수초등학교 출신이다. 한씨의 고향은 양도면 도장리로 전등사에서 서북쪽의 버스로 30분거리에 있으며 역시 전등사에서 서남으로 함허동천 계곡을 둔 포구마을이 최씨의 고향이다. 또한 두분은 인천의 중학교로 진학했고 활동무대도 인천이었다.
한창 ‘그리운 금강산’이 불리던 무렵 전망차자는 두분을 더블 인터뷰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문득 한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씨가 귀국하자 부랴부랴 두분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미 신문사 사옥안도 어두워진 저녁 복도에서 두분은 얼싸안고 감동적인 해후를 했다. 하지만 며칠후 미국으로 돌아간 한씨의 부음이 날아왔었다. 타지역에 비해 노래비 한 곳 없는 인천이 아쉬워 전망차자가 컬럼으로 다뤘더니 새얼재단에서 호응해 주었다. 예술회관 광장에 오선지로 멜로디를 적은 대형 시비를 세웠다.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평화전망대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세워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