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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11. 실미도

by 형과니 2023. 6. 19.

11. 실미도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6-24 11:35:20

 

 

 

40년전 비운의 섬 지금은 그저 아름답고 작은 무인도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11. 실미도

 

실미도 영화 포스터에 써있는 카피 한줄. ‘32년을 숨겨온 진실, 이제는 말한다.’ 한반도의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 속에 현대사의 치부로 여겨지며 역사책과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할 섬으로 단죄될 뻔 했던 실미도. 2003년 한편의 영화를 통해 그 속에서 벌어진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섬은 섬으로 남게 되었다. 실미도 사건이 터진지 꼭 40. 다시 그 진실을 말한다.

 

실미도 사건 1

 

1968121일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의 목을 따기 하기 위해서울로 침입했다. 정부는 ‘1·21 사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같은 해 4월 북파공작원 ‘684부대를 창설했다. 일명 실미도특수부대의 대원들은 주로 사형수, 무기수, 일반 제소자 등 사회 밑바닥 인생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작전 성공시 모든 형벌 취소와 전과기록 말소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대했다. ‘작전 성공이란 북한 주석궁에 침입해서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의 목을 따기 위해 특수한 부대를 창설한 꼴이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실미도 훈련소에 입소한 31가운데 수영 중 익사 1, 대원들의 집단몰매로 1사망, 탈출하다 즉결처분 2, 무의분교 여교사 강간하다 총살 2명 등 7명이 죽고 살아남은 부대원은 24. 3개월 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 살인병기로 변한 684부대원들은 북한침투 D데이 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국제적인 데땅트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정부장이 교체되면서 졸지에 유령부대가 돼버린다.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지고 이를 알아 챈 부대원들은 1971823, 기간병 막사를 습격해 24명 중 12명을 사살하고 10여분 만에 부대를 접수한다. 이른바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대원들은 새벽 630분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탈취해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육지에 닿은 곳은 연수구 옥련동 돌산 인근이었다. 몇몇 대원은 해수욕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의 송도고 밑으로 돌아 나오다가 옥골고개에서 떡장수 할머니에게 떡 1700원어치를 사먹고 2천원을 주고 갔다. 그들은 시내로 가던 항도교통 시내버스를 총으로 위협, 탈취해 승차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 6명과 버스기사, 여차장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당시 5)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송도 길을 벗어난 버스는 학익동~용현동~숭의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를 거쳤다. 바퀴가 펑크나자 석바위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고 그들은 주석궁이 아닌 청와대로 향했다. 그리곤 그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사살되거나 자폭하면서 실미도 사건은 종결된다.

 

실미도 사건 2

 

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는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장면과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린 강인찬(설경구 분)이 올림포스 호텔에서의 살인과 홍예문에서의 쫓기는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시작한다.

 

제작팀이 처음 마음에 둔 곳은 충남 태안군의 해안과 당진군의 대난지도였다. 이들 군청은 장소 선정이나 세트장 건립 등을 적극 협조하겠다며 유치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결국 제작팀은 인천의 실미도를 택했다. 인근에 북파 특수요원들이 활보하는 앵글로 그만인 차이나타운을 비롯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30여년 전 건축물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촬영은 실미도에서 가장 많이 했다. 실미도까지 배를 통해 운반된 촬영 장비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CH-47D 시누크 헬기를 이용해 산 위까지 옮겼다. ‘1회 수송에 7천만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섬 중앙 산꼭대기에 크레인 2대와 발전기를 옮겼다.

 

극 중 훈련병 역할의 대부분은 신인배우들이다. 오디션에만 총 5,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주인공 설경구를 비롯해 31명의 훈련병들이 구성되었다. 이들 31인의 훈련병들은 실제 실미도부대원들의 동작과 눈빛 하나까지 필름에 담을 수 있도록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 때문에 영화 실미도의 주연은 31명이라고 말한다.

 

제작사는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실미도 세트장에서 제작고사를 겸한 684부대 희생자 추모제를 가졌다. 실제 생존자인 실미도동지회와 HID동지회, 설악동지회 등 북파공작원들이 참석했다. 희생자의 넋이 동하였는가. 영화 실미도는 20031224개봉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개봉 57일 만인 다음해 119일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한다. 이것은 영화계에서 일대 사건으로 불렸다.

 

실미도 사건 3

 

200373일 안상수 당시 인천시장은 실미도를 방문, 정교한 세트장 시설에 감탄했다. 이 세트장은 영화의 드라마적인 부분을 살리려고 철저한 고증과 실미도동지회 현장답사를 거쳐 훈련소가 있었던 자리에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졌다. 현장 답사 중에 발견한 주춧돌과 막사터 등을 최대한 살려 20여억 원을 들여 3개월여간 제작된 세트장이다.

 

안 시장은 문화적 가치와 시의 관광사업 진흥을 위해 세트장을 보존할 것을 관계 공무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영화 세트장 7개동은 그해 11월초 완전히 철거되었다. 인천시 중구가 불법토지형질변경과 산림법, 그리고 건축법 위반 혐의로 제작사를 고발, 세트장은 불법 건축물로 몰려 철거명령을 받고 사라졌다.

 

지역 내 여론이 들끓었다. 2004 12일 안상수 시장은 조직개편과 함께 인사를 단행했다. 실미도 영화세트장 철거와 관련된 시 문화관광체육국장과 관광진흥과장, 관광개발과장 그리고 중구 부구청장 등 관련자들이 총무과 대기등 문책성으로 줄줄이 자리를 이동했다. 이것을 두고 한동안 시청 주변에서는 3의 실미도 사건이라 불렀다.

 

실미도 사건 그 후

 

무인도 실미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1년의 특수부대원 사건 이후이다. 그러나 그 섬은 묻혀진 그 사처럼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실미도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것은 영화 실미도 이후이다. 영화 상영 후 방문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인천에서는 20이고, 형제섬 무의도로부터는 바로 눈 앞에 떨어져 있는 실미도는 무의도 하나께 해변에서 바닷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해발 49m의 낮은 구릉 섬으로 면적은 2의 작은 섬이다. 실미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본도인 용유도의 덕교리에서 흐르는 작은 냇물 때문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실미도를 향하여 흐르면 열매가 잘 열리는 풍년이요 다른 방향으로 흐르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실미도는 한강과 시화호등 주 오염원들이 위아래로 비켜가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무의도 주변에서도 물이 맑기로 소문난 곳이다.이제 누구도 실미도를 비운의 섬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작은 무인도로 기억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실미도 사건의 숨은 이야기 둘.

 

첫 번째 이야기. 버스에서 숨진 모 여교사의 제자 한명이 스승의 불쌍한 두 아이를 거의 매일 돌봐 주다가 몇 년 후 그 아이들의 새엄마가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 석바위에서 탈취당한 서울행 버스에는 박모 교사가 타고 있었다. 실미도 대원 중 한명이 사촌누나가 교사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했고 덕분에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후에 세트장 철거 관련 문책성 인사로 좌천된 중구 부구청장은 박 교사의 제자다.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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