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7-14 23:41:10
형사 - 조폭 신흥동 벽돌 창고에서 한바탕 전투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1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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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창 밖으로 엄청난 비가 내린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익숙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돈다.
황금빛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거리. 어린 여자아이가 깡충거리며 내려오는 맞은편 40계단 풍경은 시적이고 아름답다. 갑자기 비가 내리며 거리는 회색으로 변한다. 계단 풍경이 을씨년스러워질 무렵, 건물 밖으로 나서는 한 남자가 킬러의 칼날에 쓰러진다. 계단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비지스(BeeGees)의 ‘홀리데이(Holiday)’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감상적이고 슬픈 분위기의 음악 템포는 ‘살인 시퀀스’에 처연한 느낌을 불어넣어 준다. 소리와 색깔이 조화되면서 살인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비 오는 계단 위에서 벌어지는 이 살인 장면은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감독)는 숨통을 죄어오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펼쳐지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인정사정 봐줄 것 없는 필사의 승부를 담은 영화다.
예기치 않은 소나기가 몰아치는 도심 한복판에서 잔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마약 거래를 둘러싼 조직의 암투가 개입했다는 단서를 잡은 서부경찰서 강력반에 비상이 걸린다. 베테랑 형사 우형사(박중훈 분)와 파트너 김형사(장동건 분) 등 서부경찰서 소속 일곱명의 형사는 잠복 근무 도중 이 사건에 가담한 짱구(박상면 분)와 영배(안재모 분)를 검거한다. 사건의 주범이 장성민(안성기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이 신출귀몰한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마침내 형사들은 장성민의 애인 김주연(최지우 분)의 집을 들이닥치는 등 포위망을 좁혀나간다. 변장술의 대가인 도망자와 끈질긴 추적자의 목숨을 건 승부는 안개 속의 미로, 달리는 기차, 비오는 폐광을 배경으로 숨가쁘게 전개된다.
줄거리를 봐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종의 ‘캅스’ 영화다. 우직한 형사가 말 없는 살인범을 쫓아가는 기본 얼개 요소요소에 에피소드별 시퀀스를 채워 넣은 단순한 구조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은 거칠고 사실적인 액션에 눈, 비, 바람, 안개, 연기, 그림자, 낙엽, 달빛 등을 아이러니컬하게 조화시키며 기존의 어떤 영화보다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액션영화로 완성시켰다.
우 형사(박중훈)는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형사다.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의 코트 자락을 펄럭이는 멋진 형사가 아니라, 껄렁한 깡패처럼 운동화를 신고 쇠파이프를 들고 다닌다. 영화를 보다보면 박중훈이 정말 ‘깡패형사’가 아닌가 할 정도로 리얼하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창작한 것이다. 실제 형사가 박중훈이 맡은 배역인 우형사의 모델이다. 박중훈은 촬영에 앞서 실제 모델의 형사와 함께 인천서부경찰서 숙직실에서 1주일 정도 먹고 자면서 행동, 말씨, 옷차림 등을 눈여겨보며 ‘형사’가 되었다.
타이틀이 올라가는 영화 초반, 우형사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무너진 창고로 향한다. 곧 이어 창고 안에서 흑백 화면으로 조폭들과 한바탕 전투를 벌인다. 이 장면은 중구 신흥동 수인역에서 인천여상 까지 길게 이어진 투박한 벽돌의 창고 중 하나에서 촬영되었다.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라는 뜻의 신흥동(新興洞)에는 광복 당시 곳곳에 적산(敵産)가옥 등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미소 쌀 창고였다. 옛 시립병원(현 보건환경연구원)과 수인역 인근에는 가등(加藤)정미소, 역무(力武)정미소 등 크고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에서 정미한 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의 기찻길을 창고 안까지 연결시켰다. 현재의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 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들은 한동안 사동 삼거리부터 수인역까지 어깨를 겹치듯 줄지어 있어 색다른 풍
경을 자아냈다. 해방 직후 각종 보세창고로 사용됐고 6·25 전쟁 당시에는 군수물자 창고로 이용되었다. 그후 고려정미소, 선경창고 등으로 불리다가 70년대 들어서 하나둘씩 디스코텍과 카바레 등으로 ‘용도변경’ 되었다. 인근에 민가도 없을 뿐 아니라 천장 높게 두꺼운 벽돌로 지어져 간단히 손을 보면 훌륭한 춤공간이 되었다.
영화를 촬영할 때(1999년)만해도 붉은 벽돌의 창고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제는 이마저도 거의 다 없어졌다. 대형마트, 가전양판점,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서너 동의 창고만이 옛 흔적을 초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쪽의 고층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파트에 둘러싸인 창고가 손바닥 만하게 보였다. 신흥동 창고거리는 붉은 벽돌에 말라 비틀어져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퇴락하고 있다.
형사들이 장성민(안성기)을 검거하기 위해 애인 김주연(최지우)의 집 주변에서 잠복 근무를 한다. 이곳의 무대는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구 송림동 8번지 일대이다. 송림동에서도 8번지는 주먹깨나 쓰는 ‘깡패 소굴’로 악명이 높았다. 이 곳을 지나면 으레 한대 맞고 푼돈 뺐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 8번지에서 옛 인천교로 향하는 고갯길을 활터고개라 불렀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지금의 도화동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던 활터가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로 숲을 이뤘던 이곳에 6·25 전쟁 이후 피란 온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솥단지를 걸었다. 고갯길을 따라 빼곡하게 판잣집이 들어섰고 구불구불 골목이 생겨났다. 활터고개는 8번지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고갯길을 넘어 주안염전으로 오갔다고 해서 자연스레 ‘헐떡고개’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고되고 힘들었다.
이 고개 위에 1970년대 초반 시영아파트가 들어섰다. 인천 최초의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쇠락한 이 아파트를 포함해서 헐떡고개 주변은 5년 전에 재개발로 인해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깡그리 사라졌다. 영화는 일종의 기록물이다. 현실에서 사라진 송림동 8번지의 옛 모습이 스크린에는 그대로 담겨져 있다.
아직도 비가 내린다.
빗방울 맺은 유리창에 영화의 또 다른 비 장면이 오버랩 된다. 영화 후반부 ‘박중훈’과 ‘안성기’가 폭우가 쏟아지는 탄광촌의 갱도 입구에서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장면은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감독은 두툼하게 겹치는 빗줄기로 박수근식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매트릭스 3>의 스미스와 네오의 빗속 대결 씬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폭우가 퍼붓는 속에서 최후
의 격투를 벌이는 스미스 요원과 네오가 서로 주먹으로 동시에 얼굴을 강타하는 장면은 탄광촌 결투와 매우 흡사하다.
영화의 끝부분 안성기와 박중훈이 마주치는 이 ‘특별한’ 시간에 ‘홀리데이’의 멜로디가 변주되어 다시 한번 흐른다. 이처럼 ‘홀리데이’와 빗줄기는 우리의 기억을 영화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
이 영화는 2001년 12월 첫째주 뉴욕과 LA에서 개봉되었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미국 배급작으로 기록된다. 한국영화가 미국 교민들을 상대로 개봉된 적은 있지만 전 미국인들을 상대로 배급되기는 이 영화가 처음이다.
미국에서의 영화명은 ‘Nowhere To Hide 1999’이다. 여기서 의문 하나. ‘No where To Hide’인가 ‘Now here To Hide’인가. 계속되는 비가 머릿속 까지 눅눅하게 만든다.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