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써니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6-24 11:38:41
인천여상 언덕길 오르내리던 추억 속 여고생들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12. 써니
요즈음 장안 극장가에는 단연 ‘써니’가 대세다. 스필버그 감독의 유명세를 등에 업은 ‘수퍼 에이트’나 미국내 박스오피스 1위인 ‘그린랜턴:반지의 선택’ 등도 ‘써니’ 앞에선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복고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써니’는 전작 ‘과속스캔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강형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자못 복고풍의 바람이 세게 불어온다. 그 바람은 소박한 욕망이기도 하고 때론 거센 돌풍이기도 하다. 복고풍은 문화예술계에서 두드러진다. 구하기도 힘든 필름카메라동호회나 LP음악동호회가 고급스런 복고풍이라면, 이젠 어느 동네나 한두 개쯤 간판을 내걸고 있는 ‘7080 라이브카페’는 대중적 복고풍의 결과다. 얼마 전 공중파 방송에서 진행된 ‘세시봉’ 음악회는 모처럼 중년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했고 그 여세를 몰아 따로 ‘세시봉 친구들’ 이라는 콘서트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복고’는 현재를 기준으로 지나간 과거를 말한다. 모든 세대엔 그들의 지나온 과거가 있고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그러나 현재 복고풍의 주인공들은 40대 후반에서 60대까지를 대충 지칭한다. 그들은 학창시절로부터 최소한 2,30년 이상 지나왔기 때문에 빛바랜 추억을 꺼내 보고 싶은 욕망이 가장 클 시기다. 동시에 자기분야에서 일정한 지위와 성과를 획득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문화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중년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나 연극 등이 자주 열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여 ‘써니’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성을 무기로 이 시대 초라한 중년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알리는 각종 연예가 뉴스를 접하면서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대세에 떠밀려 ‘지나간 학창시절’을 굳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기억해 낼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많은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지쳤고 위로받고 싶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큰소리 칠 용기도 자신도 없지만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웃고 대들던 시절이 그리웠다. 가족도 직장도 사회도 위안이 되지 못할 때 중년들은 영화 한 편으로 위로받았다.
‘지난 5월 4일 개봉한 ‘써니’는 개봉 7주차인 현재까지도 뒷심을 발휘하며 전국 관객 5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1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써니’는 16~17일 오전 6시 전국 335개 상영관에서 5만1천905명을 불러 모으며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영화가 개봉한 이래 누적관객은 491만2천494명을 기록했다. 16일 개봉한 할리우드 화제작 ‘슈퍼에이트’와 ‘그린랜턴’은 각각 4만2천436명과 2만5천393명을 기록, 2위와 5위에 그쳤다. ‘엑스맨:퍼스트 클래스’는 3만8천185명으로 3위, ‘쿵푸팬더2’는 2만6천85명으로 4위를 차지했다.
‘써니’의 이같이 매서운 흥행기세를 감안할 때 지난 14일 ‘조선명탐정’(479만명)을 누르고 올해 개봉작 중 최고성적을 기록한 데 이어 이번 주말(6월18일) 올 첫 ‘500만 클럽’에 가입할 것이 확실시된다.’
지난 주 금요일 신문엔 이런 기사가 떴고, 결국 예상대로 18일 ‘써니’는 누적 관객수 509만5천569명을 기록해 올해 개봉한 국내외 영화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이 대단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춘기 딸과의 대화가 조금 부족할 뿐인 나미(유호정)는 아쉬운 것 없이 살아가는 중산층 주부다. 어느 날 나미는 친정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 춘화(진희경)를 만난다. 춘화와 나미는 여고시절 같은 써클 ‘써니’의 멤버였다. 그들은 옛 추억에 잠겨 당시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이후 암 말기 선고를 받은 춘화는 죽기 전에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고, 나미는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써니’ 멤버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구성이라면 대강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스토리가 전개될 게 뻔하다. 사실 영화는 이 구도를 충실하게 따른다.
‘써니’의 멤버는 모두 7명이므로 여고생 써니와 성인 써니를 합치면 모두 14명이 등장하는 셈이다. 약간은 복잡하고 어지럽기도 한데, 특별한 스토리가 없으니 주인공이라도 많아야 할 듯하다. 7명의 써니는 이웃학교의 ‘소녀시대’와 영역다툼을 하기도 하고 오빠 친구들을 보면서 이성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들의 인생이 갈라진 것은 동급생과의 다툼으로 인한 춘화의 퇴학사건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젠 여고생 딸을 둔 중년에 이르러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나이가 되었다. 한 명씩 써니의 멤버들을 찾을 때마다 과거의 써니와 현재의 써니를 맞춰보는 재미가 있다.
‘써니’의 배경은 80년대다. 세칭 ‘전경’들이 가두에 등장하는 화면은 그것이 80년인지 87년인지 정확하지는 않다(교복자율화 시절을 감안해보라). 그러나 설사 그것이 80년 일지라도 화면에 눈을 주다보면 어느새 어두움보다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했던가! 지나간 것은 그저 그리움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운 것은 또 있다. 학창시절 등하교하던 그 길. 눈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그 길. 교문에서 교실까지 죽 이어지던 그 길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여고생 써니들이 오르내리던 그 길은 중구에 소재한 인천여상에서 촬영되었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언덕길이다. 현재 학교의 주소지는 신생동이지만 이 일대는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본래 1900년대 초까지는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었다.
1910년대 매립을 하기 전까지는 현 인천여상 언덕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모랫말’이라 불리기도 하다가 1903년 화개동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화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주변엔 당시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하는 ‘부도유곽’이 있었다.
또 개항 직후 2천여 명에 달하던 일본인들을 위한 ‘인천신사’가 지금의 인천여상이 있는 고지대 약 7천평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경내를 동공원이라 했다고 한다. 화개동은 그 후 신포동, 신흥동, 신생동,신선동, 선화동 등으로 지명을 달리하고 있는데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특히 ‘신(新)’자를 강조해 넣은 것이 이색적이다.
이 뜻깊은 동네에 자리잡은 인천여상 근처엔 지금도 좁은 골목길에 오래된 주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어 또 하나의 복고풍을 자아낸다. 퇴락하는 동네의 분위기를 바꾸어주는 것은 학교 담을 따라 죽 이어지는 ‘00무역’이라는 상호의 간판들이다. 학교 건너편에 인천항국제터미널이 있기 때문이다. 구도심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이참에 새롭게 변화시킬 기회란 생각이 든다.
지난 주 목요일 영화를 보려고 동인천에 소재한 오래된 영화관을 찾았다. 평일 조조라 썰렁함을 예상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중년관객들로 극장 안은 활기가 돌았다. 그 이유를 나름 분석해보니 무엇보다 스토리와 음악이 주는 ‘가벼움’과 미래가 불안한 중년들에게 향수를 핑계로 나름의 ‘위안’을 주고 게다가 캐스팅의 이중구조로 인해 모처럼 자녀와 부모가 함께 볼 수 있는 가족영화라는 것이다.
특히 영화 ‘써니’가 관객들의 복고감성을 자극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음악이다. 귀에 익은 음악은 그 멜로디와 가사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한다. 이 준비된 관객들을 들쑤셔놓는 음악들은 ‘써니’ ‘터치 바이 터치’ ‘타임 에프터 타임’ ‘리얼리티’ 등의 외국곡과 나미의 ‘빙글빙글’ 등이다.
‘써니’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지어진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물론 배우들의 의상과 소품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중년관객들 중에는 교복세대와 교복자율화 세대가 있어서 일체감을 느끼는데도 세대 차이는 있을 것이다. 감독은 치열한 문제의식이나 톱스타 없이도 적당히 감동과 웃음을 주는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영화는 과거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라 복고풍 의상을 슬쩍 걸치고 나타난 코스프레 같은 영화다. 그래서 ‘빤하지만 찬란했던 우리들의 순간’이란 영화의 카피는 동의할 수 없다.
찬란한 그녀들의 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권양녀 前 문화사랑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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