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엽기적인 그녀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6-06 10:48:47
부평역·인천역 … 男女 주인공 연결하는 매개체로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9. 엽기적인 그녀
‘빼액~’ 1899년 9월18일 오전 9시. 철마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갈(mogul) 증기기관차는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굉음과 함께 노량진을 떠나 제물포로 출발했다. 이 땅에 철도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지금부터 꼭 112년 전의 일이다. 철도는 속도와 정확성으로 세상을 바꾸어 버렸다. 노량진~제물포 간 80리(33.2㎞)를 1시간40분에 주파하였다. 나룻배와 도보로 왕복 꼬박 하루가 걸리던 먼 길을 단숨에 내달렸다. 그러나 하루에 많아야 이용객이20명을 넘지 못했다. ‘양귀(洋鬼)는 화륜선(火輪船) 타고 오고 왜귀(倭鬼)는 철차(鐵車) 타고 몰려든다’는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문물인 기차 이용을 극도로 기피했다.
철도 회사는 이용객을 유치하기 위해 광대와 기생을 동원해 풍악을 울리며 철도 연변의 장터를 돌게 하거나 칸칸마다 기생을 태우기도 했다. 일종의 판촉행사였다. 이로 인해 손님이 줄게 된 역 주변의 주모들과 기차 홍보를 하던 기생들이 한판 붙어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사고와 관점으로 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흘러 2001년.
모갈 증기기관차에서 전동차로 바뀌었지만 기차는 여전히 경인간 철길을 힘차게 달린다. 날마다 1호선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전철 타기는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지는’ 사소한 일상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일상에서, 어느날 ‘비상(非常)’한 일이 벌어진다. 110여년 전 일어났던 ‘엽기적인’ 일에 못지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복학생 견우(차태현)는 여느 때처럼 부평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행 전철을 탄다. 그는 취한 채 비틀거리는 그녀(전지현)와 우연히 같은 칸에 타게 된다. 견우는 술 취한 그녀를 힐끔거리며 계속 지켜본다. 그런데 몸을 미세하게 부르르 떨며 왠지 불안해 보이던 그녀는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우웨에엑~~~ 좌르르르르~~’ 그녀는 앞에 앉아 있던 대머리 아저씨의 가발 위에 위장 속의 내용물을 순식간에 토해낸다. 토악질을 시원하게 한 그녀는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처음 본 견우에게 손짓하며 부른다. ‘자기야~.’ 그리곤 바닥에 널부러진다.
술 취한 그녀를 업고 부평역 근처 여관방에 간 사건을 계기로 견우는 그녀의 엽기에 계속 ‘엮기게’ 된다. 그녀는 입만 열면 “너 죽을래?”하며 윽박지르고 무방비 상태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강물의 깊이가 궁금 하다며 수영할 줄 모르는 견우를 물속으로 떠미는가하면, 자신의 생일을 얼렁뚱땅 넘어가면 생명의 위협까지 가할 만큼 개념 없는 막무가내에다, ‘데몰리션 터미네이터’ ‘비천무림애가’ 같은 말도 되지 않는 소설을 써와 출판사에 갖다 주라고 들이밀기도 한다. 소주 석 잔에 대자로 뻗지만 언제나 “연속 원샷”을 외치며 털어 넣는다. 아무에게나 툭하면 꽁초 주워라. 자리 양보하라 하며 시비를 일삼기도 한다.
하지만 뭇 남자들의 눈길을 빼앗을 만큼 미모와 몸매가 빼어난 ‘팜므파탈’ 그녀는 떠나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다. 만난 지 백일 되는 날 남자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을 연출해주는 귀여운 여자다. 그 뿐이랴. 정신이 멍해질 만큼 화끈한 유혹도 할 줄 아는 깜찍한 여자다. 그녀는 4차원이지만 ‘엽기녀’가 아니다. ‘너무 이쁜 그녀’이자 ‘사랑스런 그녀’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감독 곽재용)는 젊은 남녀의 솔직 담백한 감정을 재미있게 풀어내며 그들의 고민과 사랑을 풋풋한 감동으로 그려냈다. 원작은 김호식이 1999년 8월 PC통신 유머란에 올린 자기 여자 친구와의 연애담으로 당시 네티즌 사이에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엽기(獵奇), 사전적 의미로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니는 것을 뜻한다. 이전까지는 ‘엽기적인 살인’ 같은 극악무도한 단어에 사용될 만큼 부정적인 의미였다. 이 말에 여성을 뜻하는 ‘녀’가 붙어 ‘엽기녀’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 이후다. ‘엽기’가 기괴하고 음습한 느낌을 털어내고 파격적이거나 발랄하고 귀여운 의미로 전이된 것은 이 무렵부터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천의 주무대는 부평역과 인천역이다. 정거장은 견우와 그녀를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엽기적인 그녀>에서의 인천은 생기발랄하게 표현된다. 자신의 가방과 그녀의 가방을 모두 어깨에 둘러메고 짜증과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업은 견우의 모습 너머로 ‘부평역사쇼핑몰’이란 간판이 붙은 부평역이 보인다. 여관에서 자고 난 다음날 그녀가 견우를 불러내는 약속장소 역시 광장 끝 부평역 7번 출구다.
부평역은 경인전철과 인천도시철도가 만날 만큼 중요한 곳이다. 부평은 단지 인천의 종속사가 아닌 독자적인 지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원래 부평은 왕이나 부족장처럼 높은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을 지닌 주부토군(主夫吐郡)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안남도호부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가 들어섰을 만큼 규모도 컸고 행정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농촌 지역이었던 부평의 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경인선이 부설되면서이다. 서울과 인천의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일제는 부평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군사산업도시로 만들었다. 1939년 부평역 근처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세웠다. 해방 후 이곳에 미군은 ‘캠프마켓’이란 미군 기지를 만들었다. 요즘 이곳이 ‘엽기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미군은 대량의 유독성 물질을 캠프마켓에서 불법처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평역이 둘 사이의 인연을 만든 장소라면 ‘인천역’은 견우와 그녀가 연인으로 완성되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견우가 술에 취해서 부평역을 지나쳐 종착역 인천역까지 가게 된다. 그것도 막차에 실려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인천역으로 데리러 오라고 귀여운 객기를 부린다.
스크린에는 견우처럼 가끔은 내릴 곳을 지나쳐 온 취객들과 한편에 마련된 벤치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는 행려자들이 보인다.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인천역. 한적함과 가벼운 고독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인천역. 이곳을 인천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동인천역이 한때 상인천역이라 불린 것에 대한 대구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60년 9월17일에 건립된 이후 특별한 ‘성형’을 하지 않은 그대로다. 경인선 중에 이만한 순수함을 지닌 역사는 없다. 현재 하루 296회 상·하행선이 운행된다. 하루 이용객은 7천명에 달한다. 첫차는 오전 5시에 떠나고 막차는 밤 12시39분에 들어온다. 매일 밤 막차에는 여지없이 견우처럼 제 역을 지나친 취객들이 적지 않다.
인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이제는 서울을 지나 경기도의 소요산역까지 멀리 내처 달린다. 먼 길을 달려온 경인선 기차는 엄마 품 같은 인천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출발 신호음과 함께 매일 ‘견우와 그녀’를 싣고 어김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기찻길 위에는 오늘도 수많은 엽기적인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