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파이란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5-23 22:31:18
인천 곳곳, 뒷골목 밑바닥 인생 주인공의 삶 대변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7. 파이란
지난 4월 28일 영화 ‘파이란’의 개봉 10주년을 맞아 서울 돈암동의 한 영화관에서 재상영회가 열렸다. 영화 상영 전에 감독과 배우의 무대 인사가 있었고 상영 후에는 ‘파이란을 사랑하는 모임’(파사모) 회원으로 구성된 밴드의 축하 공연도 있었다. 이번 ‘파이란’ 재상영회는 ‘파사모’가 직접 준비하고 극장용 필름상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0년 전에 상영된 영화를 여전히 사랑하고 추억하는 것은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은 삼류 건달 ‘강재’(최민식)와 서류상의 아내 중국인 ‘파이란’(장백지)의 아름다운 인연을 애절하고 안타깝게 그린 영화다. <철도원>의 원작자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 ‘러브레터’를 각색했다. 초반부는 깡패영화의 설정으로 시작했다가 깡패영화의 잔상을 지워나가고, 후반부는 멜로적으로 흐르지만 끝내 멜로의 관습을 거절하는 이중 구조의 영화이다.
뒷골목 동기이자 친구인 용식은 어엿한 조직의 보스가 돼 있지만 주인공 강재에게 떨어진 건 작은 비디오 가게 하나뿐. 미성년자에게 ‘야동’ 비디오 팔다가 구류를 살고 나온 양아치 강재는 동네 오락실에서 담배 꼬나물고 괜한 공갈만 일삼는 ‘삼류’ 건달이다. 동전 뜯어낼 때나 허세를 부릴 뿐, 깡패 동기생인 보스한테 두들겨 맞느라 조직안에서 나이 대접도 받지 못한다.
어느날 강재는 살인을 저지른 보스이자 친구인 용식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기로 계약을 하게 된다. “6기통 디젤배 한척 딱 앞세우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사항을 십수년 째 되풀이한 그로서는 그 꿈을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거래이다. 강재는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영문 모를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강재씨 고맙습니다. 강재씨 덕분에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친절한 건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별다른 생각 없이 서류 위조를 통해서 위장 결혼을 했지만, 파이란에게 있어서는 결혼해준 자체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강재는 혈혈단신으로 한국땅에 찾아든, 하얀 난초꽃이라는 뜻을 가진 파이란(白蘭)에게 유일하게 가족이란 것을 만들어 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그에게 날아든 것이다.
고향 후배 경수(공영진)와 함께 형식적으로 죽은 사람의 남편임을 확인만 해주는 절차를 위해서 그녀의 주검을 찾아간다. 죽은 파이란을 만나러 가는 여행은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여정으로 그려진다. 그 여정에서 ‘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남자’라고 믿어 준 파이란의 편지와 사진을 보고 점차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의 존재가 점점 마음 속에서 자라난다.
그 여정에서 다시 보게 된 강원도의 바다와 어쩌면 처음 들어보았을 ‘사랑한다’는 말을 통해 잠들어 있던 강재의 영혼이 서서히 흔들어 깨워진다. 이 장면부터 영화엔 물기가 조금씩 번진다. 그녀가 남긴 착한 편지에서 사랑을 느낀 그가 깡패짓을 그만두려는 순간 조직에 의해 살해된다.
영화 속 주인공 강재와 파이란은 살아서 서로 직접 맞닥뜨리는 일이 없다. 비디오 가게 유리 너머로 강재를 만난 파이란은 경찰에 연행되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강재가 낡은 반명함 사진 한 장으로 알고 있는 파이란을 직접 보게 되는 것 역시 그녀가 죽은 뒤였다.
‘파이란’은 이듬해 3월 프랑스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등 4개 부문의 상을 석권했으며 프랑스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탐정 소설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멜로 드라마를 결합시켰다며 이중적인 서술 구조가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평했다.
영화는 서해안 인천과 동해안 강원도 고성 일대에서 촬영됐다. 인천은 바다 건너 온 중국의 3류 인생과 한국의 3류 인생과 뒤섞여 사는 변두리 공간으로 묘사된다. 카메라는 어떤 채색도 기교도 없이 이 우중충한 공간의 누추함을 고스란히 전시한다. 파이란이 입국심사대를 지나는 첫 장면의 모노톤은 당시 인천의 색깔을 그명하게 대변한다.
흑백 톤의 첫 장면이 페이드 아웃되면서 ‘1년 후’의 자유공원 옛 비둘기집 광장에서 해무 낀 인천항을 잡으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파이란은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보라는 엄마의 유언을 따라 차이나타운에 들어선다. ‘중화가’란 현판 글씨가 새겨져 있는 패루를 지나 파이란은 중국요리 집 ‘풍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어 강재의 씬. “강재야… 강재야. 씨× 강재야! 생각 좀 하고 살자. 생각 좀 하고 살어!” 깡패 동기생인 보스 용식에게 빰을 맞으며 비참하고 구질구질하게 강재가 등장하는 곳이 (구)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개항박물관) 건물이다.
제작팀은 이 동네의 한 창고를 빌려 비디오테이프와 만화책들을 사다 빼곡히 채워 주인공 강재의 비디오 대여점을 완성했다. 당시 많이 내린 눈으로 촬영이 지연되는 바람에 두달 이상 비디오 가게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촬영장은 주변과 너무 잘 어울려 오가는 주민들마저도 진짜 비디오가게로 알 정도였다.
영화는 강재의 동선을 따라 중구 개항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인천 중구는 100여 전 각국 영사관, 근대식 은행, 극장, 공원, 호텔, 카페가 즐비하고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모단뽀이’ ‘모단걸’이 활보했던 개화의 도시였다. 그랬던 곳이 ‘파이란’에서는 강재의 말대로 “옛날에도 호구(虎口)고 지금도 호구고 국가대표 호구”에 불과한 ‘루저’들의 거리로 표현된다. 관광특구가 되기 전 중구 일대의 ‘생얼’ 모습이었다.
영화 ‘파이란’ 속에 등장하는 인천의 곳곳은 뒷골목 밑바닥 인생 강재의 삶을 대변한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서 강재의 순박한 마음은 살짝살짝 드러난다. 대표적인 장소가 동구 송현시장 내 순대국밥집 ‘영종집’에서이다. 그 집에서 강재는 후배 경수(공형진)와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을 꿈을 이야기 한다.
영종집은 아직 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 시장 한가운데 있다. 이 시장은 얼마 전 문화관광부와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등으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시장 안에는 옛 향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빨래터와 펌프장 등을 복원해 놓았고 길거리갤러리도 만들었다. 송현시장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된 것은 인근에 골목들이 그대로 살아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대 달동네였던 곳을 추억할 수 있는 수도국산 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영종집 좁은 가게 안에는 오늘도 강재와 경수처럼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순대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주객들이 모여 있다.
‘파이란’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극장에서 막을 내린 후 ‘파이란’은 KBS에 방송 판권이 팔렸다. 그런데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농도 짙은 욕설이 많아 방송에 어려움이 있었다.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거북하지 않은 살아있는 대사 속 욕설이었지만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과 주연배우 최민식은 TV시청자들을 위해 영화 주요 장면을 다시 녹음했다. TV에서 방송된 ‘파이란’에서는 심한 욕설을 들을 수 없었다. ‘순화된’ 욕설이었지만 ‘파이란’의 감동은 그대로였다.
글=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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