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김씨 표류기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8-06 10:56:22
무인도 표류 男-은둔형 외톨이 女 '현대인의 자화상'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18. 김씨 표류기
여름이다. 무더위를 예상했다. 그런데 비가 퍼붓는다. 더운 것 보단 낫다싶었다. 좀 있으니 사방에서 물난리가 났다. 이건 또 아니다. 차라리 폭염이 낫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더위도 싫고 끈적한 습기도 싫은 계절이다. 이럴 때 누구나 한번쯤 먹게 되는 생각이 있다.
‘어디 무인도에 가서 남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돌아오면 좋겠다’는.
그래서 여름이면 가장 부러운 사람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 씨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 헐리우드에선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가 있었고 한국에선 그 10년 후에 나온 ‘김씨 표류기’가 있다. 두 영화 모두 자발적으로 무인도에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는 공통점으로 봐선 ‘한여름 무인도행’은 아무래도 ‘한여름 밤의 꿈’으로 족할 듯 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가 2009년 5월 개봉할 당시만 해도 많은 언론과 영화계 종사자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지만 관객 동원엔 실패했다. 무인도행을 그렇게 바라는 수많은 예비 ‘로빈슨’ 씨들로부터 ‘김씨 표류기’가 외면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해준 감독은 전작 ‘천하장사 마돈나’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부터 시나리오 작업과 공동연출 등의 경험으로 충분히 실력을 쌓아온 기대주였다. 그 때문에 한국 상업영화계의 큰 손으로 통하는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에서 제작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행을 걱정할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 이제 ‘김씨 표류기’로 들어가 보자.
남자 김씨(정재영분)는 카드로 인생을 저당 잡힌 몸이다. 현대인에게 카드란 아마 한 사람의 삶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첨단의 물건일 것이다. 남자 김씨는 결혼도 하기 전에 이미 카드빚으로 인해 앞으로의 삶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모든 걸 포기하기로 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 미련 없이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린 김씨가 불시착한 곳은 밤섬이다.
밤섬은 원래 사람이 살던 섬이었는데 1968년 정부에서 1차 한강개발을 하면서 섬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밤섬에 한강 물에 흐르는 토사가 쌓여가면서 다시 섬이 형성된 것이다. 지금 밤섬의 면적은 27만3503㎡으로 매년 4200㎡씩 면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밤섬은 1998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때문에 각 종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다양한 종의 새와 물고기들이 밤섬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밤섬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최대한 환경보호를 한다는 조건으로 단 8회 촬영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영화 촬영 외에는 허락된 것이 없어 밥 먹는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모두 그때그때 섬 밖으로 나가 해결했다니 그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뜻하지 않게 밤섬에 표류하게 된 김씨는 ‘죽고자 하니 살아난 자’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으려고 한강에 뛰어든 때는 언제고 지나가는 유람선에 팔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은 또 뭔가! 전원이 꺼진 핸드폰도 무용지물. 이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조요청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난다. 아직 김씨는 물에 젖은 양복과 넥타이를 걸치고 있다. 그러나 배가 고파지고 졸음이 몰려오고 배설의 고통 속에서 김씨는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넥타이를 풀고 양복저고리를 벗고 바지도 벗고 쓸데없는 카드로 들어찬 지갑도 내던진다. 그리고 김씨가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이 편해진다.’ 그리고 밤섬에서의 생활도 점차 편해지기 시작한다.
여자 김씨(정려원분)는 오전 8시에 일어나 9시부터 인터넷으로 출근을 하고 오후 9시면 잠에 드는 생활을 3년째 하고 있는 은둔형외톨이이다. 그녀는 이마에 있는 흉터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오로지 인터넷으로만 세상과 만난다. 가명으로 여러개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남의 얼굴과 몸매사진을 다양하게 합성해서 자신의 얼굴인양 올려서 칭찬의 댓글을 유도한다. 한 밤중 창문을 열고 달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여자 김씨의 집은 남자 김씨가 표류한 밤섬에서 멀지않은 아파트다.
실제 여자 김씨의 아파트를 촬영한 곳은 삼산주공4단지다. 삼산동은 인천과 김포 그리고 부천과의 경계지
역으로 인천의 변방으로 인식되던 곳이다. 과거 이곳은 부천군 부내면 소속의 후정리라 부르던 곳으로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고 그 당시 일본식으로 삼립정이라 하였다가 46년 해방 직후에 삼산동으로 개정되었다. 옛동명인 후정리란 마을 뒤에 우물이 있다는 뜻이고 삼산이란 이 마을에 작은 산이 셋 있다는 뜻이다. 최근 삼산동 일대가 아파트 단지와 상권이 조성되면서 신도시화 되고 있으며 상동, 중동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에서 더욱 새로운 인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어느 밤, 창문을 열고 달 사진을 찍던 여자 김씨가 망원경으로 밤섬의 남자 김씨를 포착하면서 둘은 ‘관계’를 맺게 된다. 목 매 죽으려던 남자가 밭을 일구며 ‘HELP’라고 모래사장에 쓴 걸 본 여자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단지 남자에게 ‘HELLO’란 말을 전하려고 과감히 집 밖을 나선다. 병에 메모지를 담아 한강다리에서 섬을 향해 던지는 여자의 몸짓은 그동안 쌓인 그녀의 고독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후 병을 건져 메모를 보게 된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어렵게 주고받는 대화의 여정은 참으로 지난하기만 하다.
무인도에서 자급자족하며 홀로 살아가는 남자 김씨와 방에 틀어박혀 익명으로 가짜 얼굴을 인터넷상에 퍼올리며 시간을 보내는 여자 김씨. 그 둘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무인도와 자기 방이라는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갇혀있다는 점에서, 표류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동일인물일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삶의 목표인지 무인도에서의 ‘삶’이 목표인지 불분명해진 남자와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자위하는 여자의 일상은 오늘날 너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감독은 그 지점에서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는 영화 마지막에 만나고야 만다. 그런데 감독이 원했던 관객과의 소통은 겨우 32만명으로 그쳤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7급 공무원’이 300만명을 넘긴 것에 비하면 정말 안타까운 숫자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대충 두가지다. 하나는 스토리는 괜찮은데 스토리전개가 지루하다는 거다. 둘째는 배우에게 있다. 배우 정재영은 이 영화를 위해 서서히 체중을 감량시켜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고, 온 몸을 태우고 손톱은 때가 끼도록 길렀다. 문제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몸을 사리지않고 연기를 했지만, 그래도 주인공인데, 그는 멋있어야했다. 아무리 힘든 배역이라도 주인공은 멋있어야한다. 그래서 톰 행크스는 되고 정재영은 안되는 것이다. 물론 배우 정재영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잘 생긴 배우만 찾는 관객의 눈이 잘못이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장면도 있지만 너무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앞의 지루함을 덜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전국 어디나 배달되는 한국 자장면의 눈부신 서비스정신을 보여주는 ‘진짜루’의 종업원이야기는 배꼽 빠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모처럼 찡하다. 한강정화작업을 위해 밤섬에 온 해병대 아저씨들에게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남자 김씨와 그를 만나기 위해 3년만에 처음으로 대낮에, 맨 얼굴로, 아파트를 뛰쳐나오는 여자 김씨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웃긴 건 빈털터리 남자 김씨가 시내버스에 올라타 지갑을 갖다대는 장면이다. 수많은 카드 중에 ‘교통카드’가 그를 살렸다.
하여간 ‘김씨 표류기’가 메마른 현대인의 단절된 삶과 관계회복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할리우드에서 판권을 사들였다고 한다. 한국 관객이 몰라준 진가를 할리우드가 인정한 셈이다. 권양녀 前 문화사랑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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