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천하장사 마돈나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1-08-06 10:55:21
'남성과 여성' '바다와 육지' 경계에 서 있는 닮은꼴
[영화, 인천을 캐스팅하다] 17. 천하장사 마돈나
이 영화의 제목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듯 보인다. 섹시한 여성의 상징인 팝 가수 마돈나가 천하장사라니. '천하장사'와 '마돈나'. 대척점에 서있는 이 두 존재의 기묘한 조합을 이룬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 상영)는 동성애 색채가 짙은 '퀴어 영화'이다.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독특하고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접근하며 성적(性的) 소수자의 이야기를 친근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학생의 이야기를 다뤘다고 해서 '뜨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늦었다. 동성애를 다룬 한국 영화들은 이미 2000년대를 전후로 많이 나왔다. 여자 동급생들의 사랑 '여고괴담-두 번째 이야기', 남자 교사와 남자 제자 사이의 사랑 '번지점프를 하다', 대표적인 본격 동성애 영화로 꼽히는 '로드무비', 여장 광대 공길의 사랑 이야기 '왕의 남자' 그리고 고려왕과 호위무사의 연정 '쌍화점' 등을 통해 이미 관객들은 영화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혀 놨다.
동구가 천하장사를 꿈꾸는 마돈나인지 마돈나를 꿈꾸는 천하장사인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몸무게 83㎏, 발 사이즈 280㎜인 고등학교 1학년 오동구(류덕환)는 힘세고 몸도 우람하다. 육중한 몸매와 달리 어렸을 적부터 자신은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장래희망은 ‘진짜’ 여자가 되는 것. 그것도 마돈나처럼 섹시한 여자로 성 전환해 평소 짝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초난강)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여자가 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인천 연안부두에서 소금지게를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목돈을 받아들고 자전거를 올라타고 연안부두를 나서는 동구의 모습은 이미 마돈나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껏 모은 돈은 전직 권투선수인 아버지가 저지른 폭행사고 합의금으로 다 날려버린다.
그러던 중 남다른 실력을 알아 본 학교 씨름부에서 동구에게 가입을 권한다. 수술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은 500만원. ‘인천시장배 고등부 씨름대회’ 우승 상금도 500만원. 천하장사가 되면 마돈나가 될 수 있다. ‘뒤집기 한 판이면,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동구는 앞뒤 안 가리고 씨름부에 들어간다. 하지만 부끄러움 많은 동구에게 남학생들 앞에서 웃통 벗고 맨살을 부딪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마돈나가 되려면 천하장사부터 되어야 하는 이 역설적인 코스는 뚱보 소년 오동구에게 험하고 아찔하기만 하다. 씨름팬티에 브래지어를 차고 거울을 바라보는 동구의 모습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남성성의 상징인 씨름팬티와 여성성의 상징인 브래지어, 영화 내내 불협화음의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씨름대회를 앞두고 동구의 아버지는 아들이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실패한 권투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동구를 재능대학 밑 공터로 끌어내 개 패듯 때리면서 뒤틀린 자기 삶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토해낸다. 드디어 씨름대회가 열리는 날. 동구는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간신히 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 씨름대회에서 우승한다. 얼마 후 그는 친구들의 환호 속에 ‘like a virgin’을 열창하면서 빨간 드레스 입은 마돈나가 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인천에서 80% 이상 촬영한 영화이다. 차이나타운, 연안부두, 송림동 등 인천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주인공 오동구와 인천은 흡사한 점이 많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오동구. 바다와 육지, 남과 북, 새것과 낡음의 경계 도시 인천.
영화사 제작노트에는 ‘또 다른 주인공, 인천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인천을 로케이션으로 택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항구지만 수평선은 보이지 않는 곳. 서울의 변두리이되 나름의 중심 도시. 뻥 뚫린 차선이 컨테이너들에 점령당한 ‘노동의 도시’ 인천. 인천은 영화의 출발점부터 일찌감치 오동구의 도시로 낙점되었다. 여자가 되고 싶은 꿈으로 인해 소외당하지만, 당당하게 앞만 보는 오동구 처럼, 인천도 스포트라이트가 비껴 간 그 자리에 나름의 변화를 겪어 가며 꿋꿋하게 있어 왔으므로. 헌팅 작업은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보여주는 공간을 샅샅이 헤집는 대장정이었다. 차이나타운의 패루와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등 인천을 대표하는 이미지 들 뿐 아니라, 뱃고동과 비행기 소리가 영화 내내 꾸준한 배경음으로 들려온다. 꿈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아 가는 오동구의 도시, 인천은 그러므로 배우 못지않은 이 영화의 주요 캐스팅이다. 꿈과 현실이 늘 어긋나 삶에서 주인공이었던 순간이 드문,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오동구 처럼 말이다.
영화의 공동감독 이해준·이해영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천에 대한 이미지와 로케이션 촬영지로 결정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해준) 고등학교 2학년 때, 7시간 동안 가출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바다를 보러 월미도에 갔었다. 당시 250원의 전철 비용으로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바다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감사한 기억이 있다. 인천은 바다와 공장, 차이나타운과 신도시적 면모, 다양함이 한데 엉켜 팔딱팔딱 뛰고 있는 생명력 있는 도시다. 게다가 인천은 우리 영화 모티브인 부평고처럼 씨름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해영)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34년 평생 인천에 몇 번 가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매일 밤마다 방음이 잘되지 않은 벽을 통해 일상의 소리들을 모두 들어버려서 이미 아는 사람처럼 익숙해져버린 고시원 옆방의 이웃 고시생 같은 기분이랄까. 어느 순간 벌컥 문 열고 들어가서 담배 한 대 빌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이. 인천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변방이면서도 동시에 중심인 도시란 점이 이 영화의 정서와 닿아있다고 느꼈다. 인천이라는 도시를 주인공 ‘동구’가 극복해야 할 아버지의 도시로 상정했고 미술 컨셉은 인천의 재해석으로 잡았다. 사운드 컨셉은 원거리 뱃고동 소리와 비행기, 화물열차 소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설정했다.
영화 속에서 오동구는 송림동 부처산 동네에 산다. 부처산은 재능대와 옛 선인재단 사이의 야트막한 산이
다. 돌부처 88개를 보관하고 있던 일본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산 모양이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부처산’이라 불렀다. 해방 직후 이곳에는 부처돌 조각들이 산 주변에 널려져 있어 부처산의 이름을 실감나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박이들은 발음하기 좋게 이 산을 ‘부채산’이라고도 불렀다.
이 부처산에 1959년 8월15일 인천무선학교가 들어섰다. 전쟁 직후인 1954년 6월인숭학원을 세운 노진철(1921~1992)씨가 남구 학익동 허허벌판에 허름한 단층 교사를 짓고 무선학교를 열었다.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의 노진철은 1941년 중국에서 통신공학을 전공한 무선전문가였다. 인천무선학교는 무선통신과 전기과 등 2개 과로 출발했다. 당시에 무선사는 전문직에 속할 만큼 유망한 직업이었다. 이후 무선학교는 현 위치인 부처산으로 이전했다.
1967년 무선학교의 교명은 대헌공업고등학교로 바뀌었고 1970년 말 현 재능대학교의 전신인 대헌공업전문대학이 설립된다. 1998년 6월 재능교육은 대헌학원을 인수, 대헌공전은 재능대학교로, 대헌중은 재능중학으로 각각 교명이 변경됐다.
영세민들이 모여 살던 이 부처산 동네와 관련한 비극적인 이야기 하나를 품고 있다. 1990년 9월11일 낮 12시40분쯤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 사이 야산에 만들어진 축대가 무너졌다. 9일부터 사흘 동안 쏟아진 비로 축대가 무너지면서 무려 100여 톤에 달하는 흙더미가 순식간에 축대 아래 가옥 12채를 덮쳤다. 이 사고로 21가구 69명이 살던 동네에서 주민 절반가량인 30명이 매몰돼 숨졌다. 변을 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공사장 인부나 시장 노점상 등 날품팔이 인생이었다. 사흘간 비가 내려 일을 나가지 못해 집에 있다 참변을 당했다. 이 사고는 당시 며칠 동안 전국적인 톱뉴스였다.
축대가 무너진 자리에는 후에 송림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축대 붕괴 사고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해 세운 임대아파트다. 당시 피해를 모면했던 아랫동네에도 얼마 전에 현대식 고층아파트가 세워졌다. 옛 흔적은 찾아 볼 길이 없지만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불현듯 TV브라운관에 비쳤던 아비규환의 모습이 생각난다.
스크린 밖의 부처산 동네가 한때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처럼 오동구 주변도 ‘사회적 소수 (마이너리티)’이자 ‘패배자(루저)’들이 포진하고 있다.
동구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성적 소수자이고 동구의 아버지는 실패한 인생을 탓하며 하루하루 술에 의지해 사는 사회 낙오자다. 집을 뛰쳐나온 어머니도 놀이공원 직원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다. 헝그리 정신이 전무한 씨름부 코치를 비롯한 씨름부 선배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 덕분에 영화에는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 ‘마이너’ 정서의 기류가 흐른다.
하지만 그들에겐 큰 공통점이 있다. 거듭되는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언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너진 축대에서 새 삶을 일군 송림동 부처산 사람들처럼 그들은 세상과 샅바를 겨루며 모래판 같은 삶의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한판 뒤집기를 꿈꾸며….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인천의문화 > 인천의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영화는 영화다 (0) | 2023.06.21 |
---|---|
18. 김씨 표류기 (0) | 2023.06.21 |
16. 7급 공무원 (0) | 2023.06.21 |
15. 연애소설 (0) | 2023.06.20 |
14. 애자 (0) | 2023.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