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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섬

무의도, 평화 그리고 질곡의 삶

by 형과니 2023. 6. 21.

무의도, 평화 그리고 질곡의 삶

인천의관광/인천의섬

2011-08-06 10:58:38

 

역사적 애환 서린 아름다운 섬

무의도, 평화 그리고 질곡의 삶

 

옛부터 무의도는 용유도와 함께 서해의 요충지로 통했다. 지정학적으로는 인천·경기 앞바다 배꼽부위로 동쪽이 영종도 남쪽은 영흥도 북쪽은 북도면 서쪽은 자월면과 덕적면에 둘러싸여 있다.

 

중국을 왕래하는 조공선과 상선의 해상 외교·무역 통로였고, 연평이나 백령 등 먼 바다로 나가는 고깃배들의 바닷길이기도 했다.

 

인천지방향토사는 사기(史記)에 용유지구(용유와 무의를 함께 일컬어)는 영종지방에 영속된 것처럼 쓰여지고 있다며 그 이유를 영종진영(永倧鎭營)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또 고려 말에는 왜구가 자연도를 점거하고 있을 때라 왜구가 침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선시대에는 무의에 대한 서술을 곳곳에 남겼다. 조선 세종 13년에 용유와 무의에 국영목장이 설치됐고 인천부사가 감목관을 겸직하기도 하고 영종진의 첨사도 겸직했다고 적었다. 또 용유에는 국마(國馬)61마리 무의에는 52마리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목장의 위치와 말의 수와 마구간의 규모, 동절기 사료양 등이 기록돼 있다. 목장은 450년간 존속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무의에는 아직도 국영목장 자리가 남아있으며, 말을 기르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부리(뿌리)’ 라는 지명을 간직하고 있다. 구낙구지는 옛 군청이 있었던 곳을 일컫는 지명이다. 해적들이 숨어있다 배를 습격했던 장소는 온수(웬수)부리라 했다.

 

임경업장군은 출정할 때는 무의도에서 안녕을 비는 첫 제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무의에 정박한 일본어선 어부가 속옷만 입은 채로 물을 긷자 해괴망측한 행동에 분개한 동네 청년들이 어부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도망친 일본인들이 일본영사관에 이들의 폭행을 고발했으나 그들의 행동이 너무나 야만적이어서 다행히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시달림을 당하기도 했다.

 

 

무의도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애국지사 이동휘 선생과도 인연이 있다. 1902년 의병을 일으켜 투쟁의 모의하던 동지들이 체포되자 일본경찰을 피해 무의도에 은신했다. 이동휘선생은 주민 차태옥의 도움 속에 무의도에 머무르면서 교화운동을 펼쳤다. 수년 후 이동휘선생은 무의도를 떠나며 석별의 정표로 차씨에게 금반지를 건넸다. 이 금반지는 아직도 후손들이 보관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무의는 어업의 중심지였다. 조기 파시가 서던 시대에는 수산업협동조합 전신인 용유어업협동조합이 소무의와 큰 무리마을에 있을 만큼 번성했다. 6·25직후에는 안강만 어선만 60척이 있을 만큼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 인구는 3천명.

 

하지만 인구는 서서히 줄어 한때 500명 까지 줄었다. 어업이 쇠퇴하면서 소득이 줄자 생계를 잇기 위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떠나갔다.

 

무의주민들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애환도 겪었다.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특수부대는 19684월 무의도 부속섬인 실미도에 창설됐다. 실미도는 이들이 독차지로 출입이 폐쇄됐다.

 

당시 실미도부대원들의 행패는 심했다. 주민들은 실미도 부대에 상납을 해야만 썰물때 바닷길을 따라 굴을 캐러 들어갈 수 있었다. 부대원들은 밤에는 마을로 헤엄쳐 나와 폭행을 저지르고 부녀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주민들은 밤이면 밖을 나가지 않고 문단속을 해야만 했다.

 

부대원들의 몹쓸 짓을 피해 초등학교 졸업하면 여자애들을 섬 밖으로 내보냈다어린소녀들은 동구의 성냥공장과 영등포 방직공장에 취업했다

 

주민들은 영화 실미도에 그려진 이야기들은 실제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1971년 실미도부대원 24명이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면서 민간인과 군·경찰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후 부대는 해체됐다, 실미도에는 다시 사람들이 드나들게 됐다.

 

무의도는 손길을 타지 않아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지만 자연경관이 뛰어나 알음알음 오는 이들이 많았다.

 

영흥대교가 생기는 걸 보고 우리도 다리가 놓아지면 관광객이 더 많이 오겠다 싶었죠, 그러면 그걸로 먹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주민들은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1993년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용유·무의 관광단지로 지정이 된 것이다.

 

가슴이 뛰면서 기대에 부풀었죠. 새로운 희망이 생겼으니까요주민들은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으로 편입된 지금까지 우여곡절과 번복이 계속되면서 희망은 추진형으로 표류중이다. 개발계획으로 인해 각종 규제와 세금만 늘어났을 뿐이다.

 

차라리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지정을 해제하고 규제를 풀어주세요. 다리도 민자를 유치해 우리가 놓을래요.”

 

주민들은 기다리다 지쳤다며 결단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승희기자 ysh8772@i-today.co.kr

 

 

 

관광단지 지정 이유

 

수심 최고 40m·섬들로 둘러싸여 지리적 이점

 

해수욕장·아담한 산 조화 이뤄 뛰어난 풍광

 

인천시 중구 무의도가 인천시 땅으로 들어온 지 3개월이 지난 198938.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관광명소 개발지시를 내린다. 대통령 공약사항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관광휴양단지 기본계획을 내놓고 개발적지의 하나로 무의도를 꼽았다. 국제해양 종합휴양관광지로 손색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들어서기로 한 인천국제공항이 배후에 있어 수준 높은 국제관광지로 조성해 동아시아의 허브 해양관광단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민간자본 유치실패로 차별화된 관광단지 조성이 가시화되지 않고 있지만, 분명 무의도는 매력이 넘치는 섬임에 틀림없다.

 

우선 무의도의 지리적 조건이 그렇다. 무의도는 여느 섬의 수심과 다르다. 인천 앞바다의 대부분 섬이 10m 안팎의 수심을 갖고 있다면 무의도는 최고 40m 수심을 자랑한다. 인천해역방어사령부가 이전 대상지의 하나로 무의도 서쪽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 얘기지만 무의도가 어업전지기지로서 큰배(중선)들이 몰려든 것도 다름 아닌 수심이다. 여기에 무의도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쳐져 태풍으로 인한 높은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던 까닭이다. 큰물을 뜻하는 무의에서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98년 인천시가 투자유치를 위해 짠 용유·무의관광단지 조성계획에서 동화나라를 연상케 하는 앨리스랜드가 바로 무의도의 개발 콘셉트이었다. 무의도 북서쪽 실미도와 하나개를 잇는 3795에 조각공원·콘도미니엄·야외공연장·카지노호텔 등을 세우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주변에는 해수욕장과 아담한 산이 어우러져 여느 섬보다 뛰어난 풍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에서 가장 큰 갯벌이라서 이름 지어진 하나개 해수욕장은 길이 1.5의 해변에 밀가루를 뿌린 듯 고운 모래가 살포시 덮고 있다. 오목하게 들어앉은 백사장 남쪽에는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드라마 촬영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무의도 해변의 명물 중 하나는 실미해수욕장과 실미도다. 하루 두 번 썰물 때 징검다리로 건너 들어갈 수 있는 실미도는 두 얼굴을 가진 섬으로 알려져 있다. 무의도를 바라보고 있는 해안 동쪽은 고운 자태의 여성상을, 서쪽해안은 희한한 암석들로 가득차 있어 남선의 기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이 두 해변에는 그리 높지 않지만 울창하고 다양한 풀꽃나무로 뒤덮인 호룡곡산과 국산봉이 이웃하고 있다. 호룡곡산과 국사봉이다. 이곳에 오르면 세상을 품은 듯 한 희열을 맛볼 수 있다. 팔미도를 포함해 승봉도, 자월도와 덕적도 등 바다에 떠 있는 별로 불리는 섬 무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무의도가 국제해양종합휴양단지로 꼽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