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 박팔양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내릴 제.
축항 카페에로부터는
술 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쎄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오?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사이로
물결 헤치며 나가는 배의
높디높은 마스트 위로 부는 바람,
공동환의 기빨이 저렇게 퍼덕거린다.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조선지광」, 1928.7.>
박팔양(1905~1988)시인은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정지용, 박제찬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했습니다. 1923년 '신의 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중외일보·만선일보 기자를 역임했습니다.
1927년 2월 인천에서 창간한 '습작시대' 1호에 실린 '인천항'은 당시 인천항의 모습이 전면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인천항의 정경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세관의 기', '상해로 가는 배', '세계로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술취한 불란서 수병', '상동성이 고향인 부두 노동자' 등은 개항 이후 달라진 1920년대 인천 항구의 이국적인 관경을 보여주는 대상들입니다.
세계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나타내 주기에 충분한 제재들입니다. 이처럼 근대적인 항구 도시로서의 경관이 시각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시 '인천항'의 또 다른 특징중 하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전국 혹은 각 국에서 인천항으로 온 노동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1920년대를 전후하여 국내에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외국으로 떠나거나, 죄가 없어도 국외로 내쫓기며 정치적인 이유등으로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여 옮기는 사람들이 많았던데 반해. 국내를 출입하는 세계주의자들의 수는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일제 강점의 시대 상황에 놓여 있던 당시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을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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