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眼鏡) / 「애체덕」본 목참판(穆参判)
잦았던 안경화(眼鏡禍)…왕외숙(王外叔)이 자살(自殺)도
안경(眼鏡)이 빚은 한(韓)—일분규(日紛糾)
1891년(고종26년)일본전권공사 대석정기(大石正己)가 고종을 알현하고자궁중에 들어왔다.궁중에서는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왜냐면 대석(大石)공사가 안경을 쓰고있기 때문이었다.연상의 어른을 뵙는데는 안경을 벗는게 예도인데 하물며 왕을뵙는데 안경을낀다는 것은 불손하기 이를데없기 때문이다.내시들은당시 통변인 현영운(玄暎運)을 통해 안경을 벗을것을 요구했지만 무슨뱃심인지 막무가내고 왕을 알현했다.
고종도 여간 불쾌해하지 않았으나 외국사신에게는 비위를 거슬리게해서는 안된다는 왕의 모토에따라 아무일없이 알현은 마쳤다.한데 조정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을수없어 일본정부에 나라를 얕보고 왕에 불경이라고 정식항의문을전달하였다.일본정부는 이 항의를묵살하고 대꾸를 하지않았다.왕의노여움에 보답할길이 없었던 근신들은 애꿎게도 통변인 현영운(玄暎運)을모함하여 유배시킴으로써 이 안경사건을 일단락 지었던것이다.
1882년 중국 이홍장의 알선으로 초빙돼온 독일사람 묄렌돌프도 눈이나빠 꼭안경을 끼어야했다.
그가 청나라를 떠나 올때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의 왕을 뵐때는 조선식으로 큰절을 세번하고 안경벗는 일을 잊지말아야 한다고 타이름을 받았던것이다.
묄렌돌프가 그의 아내에게 부친편지로 그 첫알현광경을 실펴본다.「왕은 일단 높은자리에 앉아 계셨고 나는 예복에다가 훈장들도 달고 있었는데 세번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였다.그리고서 통례대로의인사를 하고나니 왕(王)이 일어 서서답례를 하였다.왕은 그리고서 나에게 안경을 쓰라고 하시었는데,나는 본래 동양식으로 안경을벗었던것이다.(중략(中略))이어 나는 조선말로 다음과같이 아뢰었다.이것은 전날밤 조영하(趙寧夏)가 가르쳐주어로마자로 무턱대고 연습해 두었던것이다.
Sini kuikuke wa pollo posini,kamtsick hawa,kalliektsinsim haolkosini,kuntsu kesoto kangsine sienimhaopsikirul paramnaita.(신(臣)이 귀국에와 불러보시니 감칙하와 갈력진심(竭力尽心)하올것이니,군주(君主)께서도 강신(降臣)에 신임(信任)하옵시기를 바랍나이다)왕은 이에 퍽 호감을 가지신 모양으로 내가 물러나올적에 일부러 일어서시었다.」
순종(純宗)은 근시안(近視眼)이었다
외국사신들의 불손한태도만 보다가 안경을 벗고 조선식으로 큰절을 하며 모르는 후리말이라도애써하는 이 묄렌돌프를 보고는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그후 그에대한 고종의 신임을두고「애체덕」(주(註)=옛날에는안경을 애체라불렀으며,안경덕분이란 뜻이다)이라 하였고,옛날독일에서도 웃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벗는버릇이 있는데 그 덕분으로 왕의신임을 얻었다고 비꼬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고종은 구습을 버리는데는 소극적이었으나 개화에는 대담한동조자였다.그런분이 안경을 두고 관심이 그토록컸다면 그 이전왕들은 더말할 나위가없다.헌종(헌종(憲宗))때 왕의외숙이 안질이나 안경을 쓴채로 왕의옆을 지나갔다.헌종은 그불경에 여간 노하질않았다.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외숙(外叔)의 목이라고칼이 들지않을꼬』하고 뇌까리매 이말을들은 안경낀장본인은 며칠을 고민하다가 끝내는칼을 목에찔러 자살해버린것이다.영국여인 버드비숍여사가 만나뵌 황태자시절의 순종은『건강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보이며,체질이 허약하고 꽤 비만하였다.또한 강도의 근시안이었는데 예법상 안경을써서 안된다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데없다』하였다.합병후 순종은 공석상이 아닐때는 강한근시안경을 쓰고있었다한다.
강화도에서 일본군함 운양호를 포격한데 대한 사죄형식의 수신사(修信使) 김기수행(金綺秀行)이 일본에 입경할때 한결같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조선사람들은 눈 나쁜 사람이 많은가보다고 일본사람들은 생각했지만 실은 열등국민을 대한 고자세의 과시로서 안경을 썼던것같다.시위용의 안경인것이다.
서재필이 개화내각의 성립을 보고 미국서 달려와 친로파의 책동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파천(播遷)중인 고종황제를 배알하고 대궐로 돌아가실 것을 간청하였다.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로파 이범진(李範晋)은 서재필을 모략하길 다음과같이 하였다.『황제를 뵙는데 외신(外臣)이라 칭하고안경을 쓴채였으며 권연을 피며 뒷짐을 지었으니 조정이 통틀어 분통해 하였다』고.
대낮에 별이뵈는수정경(水晶鏡)
중국에 처음안경을 들여온 네덜란드사람 이름을 따라「애체」라고불리었던 안경이 한국에 알려진것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와있던 명(明)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 중 현소(玄蘇)가다같이 늙었음에도 안경을꼈기에 잔글씨를 거뜬히 보아넘김다는데 조야(朝野)가 감탄한데 비롯된다.
선조때 이미 하사품목(下賜品目)으로 안경이들어있었으며 순조때는 꽤 민간에 보급되어 180여년전 김득신(金得臣)이 그린팔기도(八技図) 그리고 1백여년전 혜산(蕙山)이그린 그림가운데에 안경쓴 인물이그려져있을 정도다.
초기안경은 귀중품이었기에 수정알에 금으로 알테를 하였고,노끈을 매어 합치면 하나가 되고 펼치면 두개가 된다하였다.이 절접식(折接式) 안경에 코걸이가 달리고 그다리테는 귀걸이 식이면서도 마치 작대기가 양쪽뒷머리를 짓누르듯한 디자인으로 보편화하였다.안경알은 주로 수정이었으며 누렁,검정,파랑따위가 있어 색안경으로도 많이 썼다.특히 언양(彦陽)과 경주(慶州)산 수정은 품질이 뛰어나 김완당(金阮堂)의말을 빌면극상품의 수정안경을 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하고 왕에게 안경하나를 선사하기까지 했다.
당시 안경은 지름이 2촌(寸)안팎이고 수정의두께는 1분(分)7이(厘)내외,테는 조개껍질(초기)이나 자라껍질(후기)로,이역시 굵기가 2분오리(分五厘)나되어 개화기때 한국에 온 외국사람으로,하여금『안경이 너무 무거워 한국사람의 코가 납작해졌나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안경에서 코걸이가 없어지고테가 가늘어져 은터,금테가 되고무테안경까지 발전하였고,다시 둥글던 알이 보스턴형,웰링턴형,폭스형,레디즈형으로 변화해가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466919681217m1042&set_date=19681217&page_no=4
'옛날공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82년에 맞은 한독수교조약 때의 사진 (1) | 2024.07.05 |
---|---|
이름에 대하여.. 개화백경 51 (2) | 2024.07.05 |
근대개화기 서양화가의 프레임으로 본 한국의 복식문화. - 엘리자베스 키스와 릴리안 메이 밀러를 중심으로 - (0) | 2024.03.17 |
모두 '얼음땡'이 되었던 그 시간 (1) | 2024.02.25 |
사라진 전차, 불 쏘시개로 돌아온 침목 (0) | 2023.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