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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공책

이름에 대하여.. 개화백경 51

by 형과니 2024. 7. 5.

이름

 

쇄국(鎖国)을 뚫은 지 백 년(百年)‥ / 개화백경(開化百景) / 겨레의 애환(哀歡)을 엮는 특별연재(特別連載) 51


"여자(女子)이름 때문에 약(弱)해진 나라"한국(韓國)
창씨(創氏)로 얼룩지면서도 고유사상(固有思想)은‥
「꼬치미」라는 예쁘면서도 가난한 여명(女名)
황제(皇帝)이름 본땄다 옥(獄)살이
창씨(創氏) 1호‥‥송병준(宋秉畯)→야전평차랑(野田平次郎)

◎감수(監修)해주시는 분들

◇박종화(朴鍾和) ◇유봉영(劉鳳榮)

◇이서구(李瑞求) ◇이은상(李殷相)

◇함석헌(咸錫憲) <경칭략(敬称略)>

한국판(韓国版)오델로 박(朴)똥칠개

수피아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할머니를 알고있다.사변후 경인여객 차속에서 구걸하던 거지할머니다. 예배당에서 지어준 이름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동네 숲 속에 버려진 불의의 사생아였다. 숲에서 주웠다고 하여「숲 아이」란 뜻으로「숲의아」「수피아」로 전화된 것이다. 호구조사표나 동적(洞籍)에도 수(寿) 가로성을 적었다 한다. 옛날에는 이 같은 연고(緣故) 작명이 많았다. 울릉도에「고망」이란 이름이 흔하길래 알아보았더니 울릉도의 산열매인「마고망」을 먹으면 아이를 밴다는 속전(俗伝)에서 마고망 먹고 뱄다하여 그렇게들 이름을 붙였다 했다.

부모의 염원이 깃들인 작명도 우리 고유의 것이었다. 동해안의 고산에 나는 꼬치미 나물은 부지기초(不知饑草)라 하여 보릿고개의 소중한 양식이다.「꼬치미」란 예쁜 이름은 평생 굶지만 말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가난한 염원에서 지어진 것이다.

옛 이름에「김불이(金不伊)」또는「김불(金不)」이란 이름이 많은 것은 금뿌리가 되길 바라는 염원작명이요,「칠갑(七甲)」은 육갑(六甲)을 웃도는 장수 염원이다. 구한말의 유명한 도둑「엄중덕(厳重德)」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도둑대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며 일제 때 청계천 거지대장으로 큰 사회문제를 일으켰던「김부영(金富栄)」의 아버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자에게「아지(阿只)」, 남자에게 놈의「노미(老味)」란 이름은 보통명사처럼 보편화했었다.「대아지(大阿只)」「중아지(中阿只)」「대로미(大老味)」「어진노미(於真老味)」등—. 생김새대로 작대서 자근은 이(者斤運伊)(여(女)), 자근노미(者斤老味)(남(男)), 검다 해서 감정(甘丁), 잇새가 벌어졌다 하여 색치(塞恥)(새치), 심한 경우는 얽었다 하여 얼박(乻朴), 애꾸라 하여 아귀(阿貴)라 하였고 불알이 크다해서 쌍대(双大)또는 양대(陽大)라 짓기도 했다.

악명위복(惡名為福)이란 성명철학도 위세를 떨쳤었다. 정조(正祖) 때 아내로부터 똥칠개처럼 버림받았다 해서 살처(殺妻)하고 정배(定配)당한 광주인(光州人)의 이름은「박동질개(朴同叱介)」였다.

고종황제의 아명은 개똥이었고, 명정승 황희(黄喜)의 아명은 황돼지(黄都耶只)였다. 지금도 장수 황 씨의 본고장에서는 아명을 돼지로 곧잘 짓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받들고 있다.

이 같은 아명들이 융희(隆熙) 3년에 내린 호적령에 의해 그대로 한문자화(漢文字化)돼 기재되었다.

꺾새 갑순(甲順)이, 땅개 계순(癸順)이

대부분의 여자에게는 아예 이름이 없었다. 지금도 고루한 동족부락에서는 계집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여기가 기방(妓房)인 줄 아는가』고 노한다. 여자에게 있어 이름은 천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 사회적 단위로서의 인간축에 여자가 못 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실(李室) 금서방택(金書房宅) 과천생원주(果川生員主) 예산서방주(礼山書房主)등 종속적 명칭으로 불리었다.

호적령이 이름을 강요하자, 마을의 유식한 사람들은 이름 지어달라는 인파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이분들의 작명원칙 몇 가지를 살펴보자. 생일날의 간지(干支) 가운데 갑을병정(甲乙丙丁)… 등 간자(干字)만을 따 갑순(甲順)을순기순(乙順己順)등으로 지어주었고, 보패(宝貝) 이름을 따 김순(金順) 은순(銀順) 옥순(玉順)이라고도 지었다. 또 길상자(吉祥字)를 따 길순(吉順) 덕순(德順) 복순(福順)이라 하였고, 덕성자(德性字)를 딱 정순(貞順) 양순(良順) 인순(仁順)이라 하였다.

가장 많이 쓰였던「순(順)」에서 종속적 신분을 안고 들어간 이름들이었다. 불인(仏人) 듀 크로크는 구한말의 한국기행문에서 한국을「Pauvre et Douce Coree」라고 표현하고 그 빈약한 본보기로 여자들의 이름을 들고 있었다. 기독교계통 여학교에서는 입학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래이름을 지어주었고, 190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키순에 따라 갑을병(甲乙丙)… 의 간자(干字)로 이름을 매겨 내렸다 한다.

천한 여인들은 직업명을 바로이름으로 호적에 올리기도 했다. 흔한「하임(下任)」이란 이름은 상전이 비(婢)를 부르는 칭호였다.

「통직(筒直)」또는「통직이(筒直伊)」란 이름은찬비(饌婢)를 부르는 인칭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얻는다는 그 개화 이후에도 부녀자들의 재산상의 대차매매등 법문서에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성(姓)만을 기입한 옆에다가 좌장(左掌)의 손바닥 도장을 찍어야만 유효했었다. 그러기에 부녀자가 관여된 증문서(証文書)는 여느 것보다 곱이나 컸다한다. 이름의 개화가 법적지위의 개화를 뜻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완용(李完用) 종문(宗門)의 간자(干字) 항렬

30여 년 전 신문을 뒤지다가 우연히 한 부고광고를 봤다. 상주이름은 빈구(賓九)였고 차례로 정구(鼎九), 성구(星九), 경구(庚九), 우일(又一), 장구(丈九) 여섯 아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들을 많이 갖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은 첫아이 이름을「빈구(賓九)」로 곧잘 지었다.「구(九)」는 아들을 이흡 낳고 싶은 욕심이나 결의를 나타낸 것이 요,「빈(賓)」은 빙(일(一))의 의음화로 그 첫째를 뜻한다.「정(鼎)」은 솔을 뜻하기에 셋째고,「성(星)」은별이기에 다섯째,「경(庚)」은 일곱째의 간자(干字) 요, 우일(又一)은 마지막 하나만 더 낳으면 소망의 아홉을 채운 대서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장구(丈九)는「십구(十九)」란 음이 고약해 장(丈)(십(十))을 따은 것이다. 이 다복한 자식광의 노인은 그 염원을 이루고 죽은 것이다.

사가(史家) 김화진(金和鎭) 응의형제간은 중자(中字)에「구(口)」자의 수로써 그 서열을 정하였다. 선(善)(1) 진(鎮) 희(喜)(2) 진(鎮) 소(蘇)(3) 진(鎮) 기(器)(4) 진(鎮) 오(吾)(5) 진(鎮)으로—. 그리고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의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칙과는 달리 이완용(李完用) 이윤용(李允用)은 갑(甲)(용(用))자(字) 서열이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는 을(乙)(구(九))자(字) 서열이다.

적출(嫡出)과 서출(庶出)을 이름으로 차별하기도 했다. 적자(嫡子)는「일(日)」자(字)를 위에 올리고(창(昌), 호(昊), 욱(昱)등) 서자(庶子)는「일(日)」자를 옆으로 붙인다(소(昭), 영(暎), 만(晩)등).

이 같은 까다로운 복자(伏字)로 서열을 정한 풍조는 대원군집정시대에 유독 심했다. 당시 가문 없고 돈 많은 사람들이 양반의 방계 또는 서계(庶系)리는 명의를 비씬값으로 시들이는족보시장이 도처에 형성되어 피의순수성을 치켜 내리려는 모럴을 크게 위태롭게 했었다. 이 족보매매가사회문제가 되고 금령이 내리자 양반가문의 체통을 까다롭고 은폐된 복자서열(伏字序列)로 응호 하려는 풍조가 생겨난 것이다.

「말루하(抹楼下)」란 이름의 창녀(娼女)

융회원년의 정변에 완산군(完山君)의 끝아들 예양정(礼陽正) 이재규(李載規)가 폭도(暴徒)에 가담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벌컥 뒤집혔다. 칙령(勅令)으로 예양정(礼陽正)이라는 존칭(尊称)이 박탈되고 이사실을 관보(官報)에공표하는동시에 옥에 가두었다.

한데 당시에 황족의 재판은 특별법원을 구성해 심판하게 돼있던 때라 문제가 생겼다. 법부대신 조중응(趙重応)은 존칭이 없더라도 황족(皇族) 임에는 틀림없으므로 특재(特裁)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존칭 없으면 황족(皇族)이 아니니 보통법원에서 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어는 다른 나라에 못지않게 계급의식이 강했던 우리나라에 있어 인칭대명사는 이름 위에 있었고 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왕자도 적출(嫡出)은「대군(大君)」이요, 서출(庶出)은「군(君)」이며 대군(大君)의 적손(嫡孫)은「도정(都正)」인데 서출(庶出)은「영(令)」이라 하였다.

부마는 위(尉) 요, 왕비(王妃)의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이다. 심지어 관리의 품계(品階)로따져 자기 품계보다 낮은 벼슬자리에 있으면「행(行)」자를 썼고「자헌대부(資憲大夫)(정이품(正二品))행(行) 강화유수(江華留守)(종이품(從二品) 벼슬)」품계(品階) 보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 수(守) 자를 썼다.<「선교랑(宣教郎)(도육품(徒六品))수(守) 이조좌랑(吏曹佐郎)(정육품(正六品) 벼슬).>

관직이 없으면 유학(幼學)이라 했고 상민은 한량(閑良), 초관(哨官)이라 하였다. 연로자는 그 나이의 간격에 따라 생원,첨지,영감,노형으로 달라지고 연소자역시 나이 간격에따라 서방, 직장, 도령(道令)으로 달랐다. 의사는 주부(主簿), 약방할아버지는 봉사(奉事), 천한여인들에게는 지금도 말루하(抹楼下)라 부르는 노인이 있다. 이토록 세분화된 인칭대명사가 오히려 이름의 역할을 대행했으며 그 인칭의 구분은 동계급 이계급(異階級) 간에 다시 달라져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이 끝나면 이 인칭을 배워야 했을 정도였다.

엄마 이름은「여보(女甫)」래요

성도 이름도 없던 여인이나 천민들이 호적이탄 개화에 이름을 강요받자 갖은 난센스를 다 빚었다. 당시 통계적으로 가장 많았던 여자 이름은 소사(召史), 성녀(姓女), 여보(女甫)였다.

소사(召史)는 신라시대의 이 두음으로「조이」라 불렀던 여성칭호였다. 당시에는 여사(女史)란뜻으로, 천한칭호가 아니었는데 이조시대에 이르러 상민(常民)의 부인에게 붙이는 보통명사로 천시되었었다. 이조실록(李朝実録)에보면 역신(逆臣)의 어머니나 부인을 정경부인(貞敬夫人)에서 소사(召史)로 칭하한다는 기록들이 많다. 이 보통명사에 성만을 붙여 그대로 호적의 이름으로 올린 것이다.

성녀(姓女)는 모성(某姓)의 여자란 소극적 인작명이다. 즉 이름이 아니라 성(姓)을설명한 것이 바로 이름으로 통용한 것이다.「우리 엄마 이름은 여보래요」하는 귀여운 동요가 있듯이 호칭명사 여보를 그대로 한문자 화해서 오녀보(吳女甫), 나 여보(羅女甫)라 이름을 짓기도 하였다. 또 희성(稀姓) 가운데 1백2개가 이호적에 성명을 기재할 때무식에 의한 과오때문에 생겨난 것들이었다. 금씨(今氏)는 김 씨(金氏)의 과오요, 위 씨(委氏) 이 씨(梨氏)는 이 씨(李氏)의 잘못이고, 채 씨 증씨(采氏曽氏)는 송 씨(宋氏)의, 백 씨(白氏)는정씨(丁氏)의, 목 씨(穆氏)는목씨(睦氏)의 잘못이었다. 성이 없는 천민들 은인스턴트로 성을 창조하기도 했다.

황족의 이름과 관명을 이름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이었다.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배명받았던 유계문(柳季聞)이는 관찰사(觀察使)라는 관직이름에 자기 아버지(유명관(柳名觀))의 이름자가 끼여 있다 하여 부임(赴任)을 거절하여 효자라고 칭찬받았다. 결국 아버지가 그 정을 알고 이름을 유관(柳寬)이라 바꾼 후에야 부임했던 것이다. 그만큼 관명과 황제이름은 기피하였다. 융회 3년 민적박(民籍薄) 편찬 때 해미(海美) 사람에「박희화(朴熙火)」란이름을 두고 말썽이 났었다.「희화(熙火)」는 바로「희(熙)」를 띄어 쓴 것으로 곧 고종황제의 이름인 것이다. 잡아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먹어 들어, 작명옥 안(作名獄案)이란 색다른 형사(刑事)가 형성되기까지 하였다. 일제(日帝) 하의 창 씨(創氏) 명 때김혜인(金惠仁) 김영인(金英仁) 형제는 본관이름을 따 김해혜인(金海惠仁) 김해영인(金海英仁)이라 창 씨했다가 고등계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혜인(惠仁)은 일본 명치천황의 할아버지인 인효천황(仁孝天皇)의 이름이요, 영인(英仁)은 1백18대 후도원천황(後桃園天皇)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이형제는 혜인(惠人), 영인(英人)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등(伊藤)」등 사 대창씨(事大創氏) 유행

양복을 입을 때 이의에는 일본옷인 두 겹하오리에 센다이 히라를 입게 마련인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은 최초로 창씨개명한 사람이었다.

이미 북해도에서 인삼장사를 할 때부터 창 씨를 했으니—.

야전평 차랑(野田平次郎)—. 기생방에 가면 노다(야전(野田))대감이라 불렀다.『송대감 조선옷풍채 좀 보고 싶다』고 기생이 익살을 하면『나는 조선풍속, 습관에 어울리지 않고 나의 조선이름은 촌티가 난다』고 말했다 한다.

이같이 외세(外勢)를 업으려던 사대파(事大派)에서부터 창 씨(創氏) 풍이인 것이다. 일본통감청치 무렵 창씨명으로는「이등(伊藤)」「장곡천(長谷川)」이 가장 많았으며,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위세를 빌려는 속셈임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1890년대 노국세력이 득세했을 때, 당시 노국공사였던 웨베르의 한국명 위패(韋貝)의 위성(韋姓)을 명함에 찍어갖고 다니며 위패(韋貝)의 양자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그 단속을 내부(内部)에 의뢰하기까지 하였다.

황국신민(皇国臣民) 선서(宣誓)와 하마(河馬)씨

1940년 일제는「사법상(司法上)의 내선일체(内鮮一體)」를 부르짖고, 창 씨 제도(創氏制度)를 공포하고 일본이름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이때 많은 한국사람들은 그의 성(姓)과 이름을 어떤 수로든지 보존하려 갖은 애를 썼다.

김(金)씨는「금촌(金村)」「김전(金田)」등, 안(安)씨는「안천(安川)」「안전(安田)」등으로—. 이(李)씨는 글씨를 헐어「목자(木子)」, 최(崔)씨는「산가(山佳)」, 박(朴)씨는「목호(木戶)」로 본성을 보존하는 이들이 있었다. 본관(本貫)의 지명을 따평산신(平山申)씨가「평산(平山)」으로, 수원(水原) 최(崔)씨가「수원(水原)」으로 창 씨(創氏)를 하였었다.

남양홍(南陽洪)씨 가운데는 본관 고장인남양의 명산 비봉산(飛鳳山)의 이름을 따「비산(飛山)」이라 하는 이 가 있었고, 경주(慶州) 이 씨(李氏) 가운데는 신라(新羅)의 일본음을 따「백목(白木)」이라 창 씨한 이도 있었다.

성(姓)뿐이 아니라 이름도 무척 보존하려 애썼다. 탁원(鈬源) 은호(銀浩) 형제는「원일(源一)」「호이(浩二)」로 바꾸었고, 은정은 수(銀貞銀秀) 자매는「정자(貞子)」「수자(秀子)」로 본명을 보존하였다.

세계 2차 대전이 심해지면서 일제는 창 씨를 하지 않은 사람과 소위「황국신민(皇国臣民)의 선서(宣誓)」를 의지 못한 사람이면 자동차를 못 타게 했다.

필자의 고향에 두부장수를 하는하(河)씨란 분이 아버지 대상(大祥)을 앞두고이 두 가지 조건 때문에 차를 못 타고 서성댔던 일이 기억된다. 차문 앞에지 켜 서있던 일본순사가 간단한「황국신민(皇国臣民)의 선서(宣誓)」를 의지 못하니까 농담으로『하마(河馬) 같은 놈, 하마(河馬)라고 이름이 나 지어라』면서 밀어냈다. 익살인 줄도 모르는 하 씨(河氏)는 하마(河馬) 란글자를 써달래 갖고 그 길로 가서 하마(河馬)라고 창 씨를 하였다. 물론 그 이튿날에는 차를 탈 수가 있었다. 이제 그의 아들이 성장해서「하마(河馬)」「하마하씨(河馬河氏)」로 놀림받는 걸 보았다.

이름이 안고 있는 계급사상, 사대사상, 그리고 무저항사상등 한국사상의 고유한 정수(精髓)를 역력히 들여다볼 수 있는 개화 백 년이었다.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463819681110m1041&set_date=19681110&page_no=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