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박완서-엄마의말뚝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7-02-17 16:32:18
곧장 달려가면 돕 만날 듯 북녁땅은 가깝다. 실향 아픔 한 줌 상처로 날려 보낸 바닷가,
박 완서 - 엄마의 말뚝
박완서 소설 ‘엄마의 말뚝’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은 구태여 실향민이 아니더라도 ‘분단’의 상처에 대해 공감해나가는 작업이다. 어머니와 오빠의 삶을 통해 주인공 자신이 밟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전쟁과 죽음, 그로 인해 한 가족이 겪는 비극에 관한 변주곡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이 소설은 모두 3편의 연작으로 되어 있다. 198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1편에서는 남편이 죽은 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머니가 자식들을 데리고 대처로 나가 서울에 말뚝을 박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2편에서는 오빠의 죽음에 얽힌 배경이, 그리고 3편에서는 어머니의 임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진 강화, 엄밀히 말하면 ‘강화도와 개풍군 사이의 한강 폭 만한 바다’는 어머니의 상처가 묻혀있는 곳이자 그들 가족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과 가장 가까운 남녘 땅이다.
1931년, 박적골에서 태어난 소설 속의 소녀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상경한다. 어머니가 고단한 서울 살이를 감수하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자 신념인 오빠는 한때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 한 뒤 6·25 전쟁통에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머니가 오빠의 뼛가루를 들고 찾아간 곳은 바로 강화. 고향 땅 앞이었다.
북녘과 가장 가까운 남녘땅 철산리 사람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바라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恨)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 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分斷)이란 괴물을 홀려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엄마의 말뚝 2)
소설 속 어머니처럼, 강화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개풍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로 향했다. 읍내와 강화경찰서를 지나자마자 나라꽃 무궁화가 심어진 한적한 시골 길이 나타났다. 바다가 보일 때까지 가자니 제법 먼길. 어머니가 오빠의 유해가 담긴 보따리를 들고 걷자면 한시간은 족히 걸렸을 거리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개풍이 보이는 곳은 월곶리나 대산리 어디께 라는데… 그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그러나 통일의 길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길은 잘 닦여있었으나 그저 북쪽을 한번 바라보고 싶다는 단순한 방문 이유는 검문소를 순순히 통과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강화는 최전방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어머니가 해변으로 내려가 바닷물 속에 오빠의 유해를 뿌렸으리라 짐작되는 바닷가는 이제 철조망이 완강하게 버티고 서있어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오빠를 잃은 어머니가 전쟁이 끝난 뒤 오빠를 만나는 방법은 강화에 있는 동향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잇집네는 강화도의 최북단 양산면이란 데서 살았다. 그 마을에 들어가려면 검문소에서 뉘집에 무슨 볼일로 가는지를 자세히 대고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하는 최전방이었다. 이씨 가의 종중산이라는 야트막한 뒷동산에 오르면 바로 발 아래로 바다가 보이고 바다 건너로 북쪽 땅이 보였다. 섬과 육지 사이에 낀 바다는 강 너비밖에 안돼 꼭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거기가 갈 수 없는 고향 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면 그 지호지간(指呼之間)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거기가 오빠의 무덤, 어머니의 상처라고 생각하면 그 바다의 너비는 가이없었다. (엄마의 말뚝 3)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일년에 두세 차례는 강화에 다녀오고야 만다. 자제하느라고 하는 것이 그랬다. ‘그것도 순전히 뒷동산에 올라 그 바다와 그 바다 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자 함이라니. 오빠의 뼛가루를 그 바다에 흩날린지 30년이나 너머 지난 뒤까지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그 짓을 낙처럼 취미처럼 계속해오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양산면’으로 그려진 양사면은 지도에서 보자면 이 섬의 거의 꼭대기, 그러니까 강화 최북단에 있었다. 철산리는 양사면에서도 북녘과 가장 지척이라 실향민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는 마을이다. 우리가 찾았던 그 날 한낮,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 한복판엔 확성기를 통해 ‘우리의 소원은…’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십여 호가 사는 철산리엔 한국전쟁 때 피난 나와 아예 눌러 사는 이들도 있다. 마을 입구 나무 그늘에 앉아 완초를 다듬고 있던 신도균(82세) 할머니도 그랬다. 연백이 고향이라는 그이는 전쟁 나던 해 서른 살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피난 나와 이날 이때까지 마을에서 살았단다. 오십 년 넘도록 고향 땅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고 살아왔지만 어느 결에 ‘이젠 그립지두 않아…’라 할 만큼 무디어졌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그리움도 당해낼 재간이 없나보다.
분단만 되지 않았던들 마을의 운명도 바뀌었을 터. 철산포라는 유명한 포구였던 이곳은 서울 마포까지 가는 배들이 생선을 싣고 들러가는 곳이었다. 일제시대 땐 700여 호, 전쟁 전만 해도 300여 호가 살만큼 번화했단다.
“장이 얼마나 크게 섰게. 그땐 살기 괜찮았지, 맥혀서 이 모냥이야.” 옆에서 묵묵히 일을 돕던 김종범(68)씨도 “통일만 되면야 말두 못하게 조∼오치”라고 거들었다.
그들이 일을 하던 나무그늘에서 오백 미터도 채 안 떨어진 바다 쪽에 망배단이 있다. 고향을 북녘에 둔 이들이 세운 제단이다. 명절날, 혹은 그들만이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날이면 술병을 사들고 와서 한참을 앉았다 가는 노인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소설 속 잇집네의 망령난 노인이 툭하면 올라가 바다 건너를 바라보면서 ‘저게 다 내 땅’이라고 괜한 호기를 부리던 뒷동산은 여기 이 산인가, 저기 저 산인가. 굳이 노인처럼 산봉우리에 오를 것도 없이 마을 어디서나 북녘 땅은 뚜렷하다. 어둠이 내리지 않는 한 날씨에 상관없이 잘 보이는 ‘그 지호지간(指呼之間)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깝다.
어머니가 살던 마을 박적골로 가자면 거기서 바라 뵈는 땅에서 20리쯤 내륙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여기서 고향 땅과 아들의 넋이 뿌려진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어머니에겐 그렇게 ‘낙처럼 취미처럼’ 해도 질리지 않을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실향민들에게도 그러하듯.
일년 중 고향을 가장 가슴 절절히 그리게 되는 때가 바로 명절일 터. 올해도 어김없이 다시 그 날은 가까워오고 고향을 북녘에 둔 사람들은 그곳이 가장 가까이 바라다 보이는 땅을 찾아 눈으로나마 흔적을 더듬으려 할 것이다. 이곳 철산리 망배단도 실향민들의 방문으로 북적거리겠지. 분단되고 나서 꼭 오십 한번째 계속 되어지는 가슴아픈 의식, 대체 이 일은 몇 해나 더 그렇게 되풀이되어야만 끝이 날까.
자료 : 굿모닝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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