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문화/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오정희의-중국인거리

by 형과니 2023. 3. 20.

오정희의-중국인거리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7-02-17 16:33:54


오정희의-중국인거리

 


전쟁으로 부서진 도시의 하늘 아래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해안동네의 삶이 세상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소녀의 눈을 통해 <중국인거리>를 무대로 펼쳐진다. 소설은 작가 오정희의 어릴 적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50년대 초반, 아버지가 석유회사 인천출장소장으로 부임하며 인천으로 이사왔다.
그러니까 <중국인 거리>는 그가 이곳에서 살았던 수년 남짓한 시간의 조각을 꿰어 맞춘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시골에서, 소녀의 가족을 실은 트럭이 '기름을 넣기 위해 한차례 멎고 두 번 고장이 나고 굽이굽이 수많은 검문소를 지나쳐 강과 산과 잠든 도시를 밤새도록 달려 날이 밝을 무렵 진입해 들어온 도시'가 다름 아닌 '인천'이었다.

 

"바다를 한 뼘 만치 밀어둔 시의 끝, 해안 동네에 다다라 우리는 짐들과 함께 트럭에서 내려졌다. 밤새 따라오던 달은 빛을 잃고 서쪽 하늘에 원반처럼 납작하게 걸려있었다. 트럭이 멎은 곳은 낡은 목조의 이층집 앞이었는데 아래층은 길가에 연해 상점들처럼 몇 쪽의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부옇게 앉은 유리에 붉은 페인트로 석유 배급소라고 씌어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집이었다."

'먼 나라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꿈꾸던 도회지가 아니라,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 모여있는' 이 도시의 풍경은 첫 대면에 소녀에게 실망감만 안겨준다.


'이른 새벽 부두로 해물을 받으러 가는 장사꾼들의 자전거 페달소리와 항만의 끝에 있는 제분 공장 노무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탓에 늘 새벽닭의 첫 날개질 같이 어수선한 활기에 가득 차 있는 동네'에서 소녀는 제분공장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고 석탄공장에서 훔쳐온 석탄을 군고구마나 딱지, 사탕 따위로 맞바꾸며 사철 검은 강아지로 살아간다.


소설 속 거리의 집들은 대개 양공주들에게 방을 세내주고 있었다.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라던 소녀의 단짝친구 치옥 역시 그랬다. 치옥과 함께 검둥이와 살고 있는 매기언니의 방에 들어가서 화장품과 속눈썹, 패티코트를 가지고 노는 재미도 소녀에게 빼놓을 수 없는 낙이다.


중국인 거리에 사는 아이들은 '아이가 한밤중 천사가 안고 오는 것이라든지 방긋 웃으며 배꼽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여자의 벌거벗은 두 다리 짬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온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작가가 이곳에 살았던 때가 50년대 중반이었으니 전쟁 뒤였다고는 하지만 그나마 중국인 거리의 색깔이 분명했을 시절이다. 개항 이듬해 이곳에 이주해온 중국인들이 형성한 차이나타운은 한때 인천제일의 상권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번성한 적도 있지만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몰라보게 쇠락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낸 흔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 법. 소녀가 살았을 시절의 몽환적이고 퇴폐적이며 어딘지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없지만, 대신 붉은 색 풍등이 흔들거리는 중국음식점들과 중국풍의 가옥들로 이국적인 분위기에 빠져볼 수 있다.


그 거리 중간, '복래춘'에서는 오늘도 공갈빵 굽는 냄새가 난다. 소설에 나오는 '옷이나 신발에 다는 장식용 구슬, 폭죽 놀이에 쓰이는 화약, 근으로 달아주는 중국차 따위를 파는 단 하나의 중국인 가게'가 혹시 이곳은 아니었는지.

가게 안에는 삼대에 걸쳐 중국인 거리에 살고 있는 젊은 화교 내외가 오늘도 아침마다 공갈빵을 부풀리며 살아가고 있다. '저녁 무렵이 되면 뒤통수에 쇠똥처럼 바짝 말아 붙인 머리를 조금씩 흔들며 엄청나게 두꺼운 귓볼에 은고리를 달고 전족한 발을 뒤뚱거리면서 여자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통해 마치 땅거미처럼 스름스름 향하는 모습'은 이제 기대하기 어려운 풍물이다.


다소 우울했으나 삶의 냄새로 생동감 넘쳤던 거리엔 양공주 대신 중국노인들이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잡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햇빛을 쪼이고 있는 그들의 대(代)에서 이 거리의 시간은 멈춘 것 같다.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던 거리의 시간은 요즘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인천역 앞 파출소와 대원각 사이에 중국인 거리를 알리는 휘황찬란한 패루가 들어서며 각종 개발계획이 세워져 관광상품으로 개발될 기대감에 부풀고 있다. 옛 시절의 정취도 그 안에 녹아날까.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


중화기독교 인민교회 옆, 중국인거리의 시작이자 끝인 지점에서 계단으로 시작되는 자유공원은 소녀가 세상을 조망하는 곳이다. '하늘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은 층계를 하나씩 올라가' 닿게 되는 공원 정상에서 소녀는 그리움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눈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성장의 비밀을 쌓아간다. 공원으로 오르는 그 길다란 계단은 삶의 무게만큼, 힘들이지 않고 오를만한 높낮이로 조절되어 있다. 계단 옆으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공원의 꼭대기에는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라는 상륙작전의 총 지휘관이던 노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창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의 깃발이 색종이처럼 조그맣게 팔랑이고 있는 사이 기중기는 쉬지 않고 화물을 물어 올렸다.


선창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섬처럼, 늙은 잉어처럼 조용히 떠 있는 것은 외국 화물선일 것이다. 공원 뒤쪽의 성당에서는 끊임없이 종을 치고 있었다."


해무에 가려 오후 세시의 해가 '희미한 낮달'처럼 보이던 오후, 소녀처럼 계단을 밟고 올라 간 자유공원은 노인들과 잔 커피를 파는 아낙이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인천 앞 바다엔 바다보다 배가 더 많다. 흑인 병사를 따라 미국으로 갈 꿈에 부풀어있던 매기언니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이어, 평생 여자구실 한번 해보지 못한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소녀는 홀로 공원에 왔다.


받침돌에 손톱을 박고 기어오른 맥아더 동상의 망원경까지는 실제 너무 높아 어른이라도 오르기는 불가능하다. 망원경에 앉아 소녀는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인생이란…'을 중얼거렸다.

맥아더 동상에서 소녀가 동강난 비취반지와 녹슨 버클, 몇 닢 백동전 같은, 할머니가 남기고 간 유품을 곱게 싼 수건뭉치를 묻어두었던 오리나무께 까지 걸어보았다.


소녀의 보폭으로 예순 다섯 발자국을 걷자면 공원을 다시 내려가거나 아니면 비둘기가 노니는 광장으로 내려가야 했다.
소녀는 어디에 수건뭉치를 숨겨두었을까. 그래, 찾지 않는 것이 좋겠다. 어린 시절, 누구나 알 수 없는 미래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은 채 나만 아는 성장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하듯, 소녀 또한 그러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