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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최인훈-광장

by 형과니 2023. 3. 20.

최인훈-광장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7-02-17 16:35:24


최인훈-광장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은 바다로부터 시작해 바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190여 쪽에 걸친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바다, 그 물빛의 이미지는 내내 책갈피 주변, 혹은 행간을 머뭇거린다. 광장 속에 등장하는 그 바다는 '인천'이다. <광장>에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암초에 걸려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지식인의 외로운 자기성찰이 그려져'(평론가 김현)있다.


해방 뒤 이념 문제로 고민을 하던 주인공 이명준이 전쟁 뒤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으로 목적지를 택한 뒤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옛 일을 더듬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설에는 인천을 비롯해서 서울과 북녘 땅도 나오지만 인천바다는 주인공 이명준의 삶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는 주요한 무대이다. 밀수선을 타고 북으로 간 곳이 인천부두이고 무엇보다 '젊은 사람이 할만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라 했던 '사랑'에 이명준이 진지하게 빠져드는 곳도 바로 '인천'이다.


꼭 반세기 전에 살았던 한 젊은 청년이 고뇌했던 이념과 사랑의 문제를 담아내기에 그 시절, 인천바다 만큼 속 깊은 장소는 없었던 모양이다. 인천에는 명준의 첫사랑 윤애의 집이 있었다. '인천거리를 북으로 빠진 변두리,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윤애네 집'으로 가기 위해 명준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경인한길(지금의 경인국도)을 달린다. 북으로 간 아버지 문제로 경찰서에 불려갔다 온 뒤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그는 '조용하고 오붓한 시골' 인천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된다.

"윤애한테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곧잘 거리를 걸어본다. 부두를 낀 거리를, 맥고모자를 눌러쓰고 기웃거리는 시간에, 그는 즐겁다. 윤애도 없고, 때리던 형사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비린내나는 어시장에서 얼음에 잠긴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저 때를 보내는 게 좋다. 얼음에 차갑게 잠겨서, 눈을 번히 뜬 채, 지붕에 박힌 빛받이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아래, 은색 비늘의 깨끗한 조기를 보고 있으면, 미술이라는 일이 가장 가난하게만 느껴지는 사무치는 울림이 있었다. 물건 살 사람 같지는 않은지, 모른체 해주는 그곳 사람들이 좋다."

'비린 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한나히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하고 목쉰 소리로 셈을 외치는 어시장'을 천천히 거닐고 '기름이 떠돌고, 나뭇조각이며 빈 병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선창'을 걸어보며 그는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의 실체에 대해 고민했다.


항구의 붐빔 속에서 무작정 떠돌다가 '바다에 서면 그대로 어디로든 가고 싶다'던 윤애와 함께 노란 파라솔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바닷가 모래분지에서 초롱초롱 별이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 사랑과 삶과 청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끝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오늘은 선창 말고 다른 데로 가요." 그는 머리만 끄덕인다. 선창을 끼고 올라가서 오래 걸었다. 명준은 이럴 때 남자가 두 사람 사이를 이끌어야 되려니, 생각한다. --(중략)-- 그들이 다다른 곳은, 왼편에 마을이 보이는 언덕진 땅 생김이 분지를 이룬, 움푹한 자리다.


오른편으로 멀리 바라보여야 할 선창과 거리는, 막아선 늙은 느티나무의 한 무리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만 트인 눈길 앞에, 선창의 붐빔을 금방 보고 온 눈에는 기이할 만큼 빈 바닷가에, 모래만 허허하게 기운 한낮의 햇살을 되 비치고 있다.

느긋하면서 두근거리는 힘이 흥건히 속에서 괴어오르고, 명준은 누구에겐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 분지에서, 조용함을 즐기듯 한참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에는, 배 그림자도 없다. 탐스럽게 푸짐한 뭉게 구름만, 우쭐우쭐 솟아있다. 이천일년 인천의 겨울부두 … 명준이 단골로 찾던 전망좋은 술집이 있었음직한 만석부두 풍경주인공이 살았던 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이천일년의 메마른 이 겨울, 이명준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렸던 경인한길을 지나 인천항에 발을 딛어 보았다.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 위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명준의 색안경 너머로 휙 달려오는가 하면 금세 뒤로 빠지던 '들'과 '뫼'가 있던 자리엔 아파트 숲과 건물들이 삐죽삐죽 들어서 있다.

한적한 어촌마을 쯤으로 묘사됐던 인천부두는 이제 옛 흔적을 한 오라기도 걸치고 있지 않다. 거대하고 말끔하게 단장한 인천항은 국제항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세련된 모습으로 쉴새없이 수출입물량을 잔뜩 실은 화물선을 들여보낸다. 항구에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들어가기도 까다로우니, 바다냄새라도 맡자면 부득이하게 만석부두나 연안부두 혹은 월미도로 가야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만석부두는 공장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 좁은 골목 끝에 숨통처럼 매달려 있다. 원래 부두가 있던 자리는 매립이 되어 마을이 섰고, 한 오백 미터쯤 더 걸어나가야 바다에 닿는다. 철지난 부두엔 초소의 해경들이 사람이 그리운 얼굴로 서있고, 배 댄 일이 언제였나 싶을 만큼 낡아빠진 방파제엔 겨울파도만 차갑게 내리친다.

찾는 이 없어 반쯤 문을 닫아놓은 부두 앞 구멍가게 주인아낙은 "그래도 봄, 가을이면 낚시 배들 땜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며 말상대가 그리웠던 투로 반긴다. 명준이 단골로 찾던 창 밖 전망 좋은 선술집이 이 부근 어딘가에 있었을지 몰라. 마룻장 밑에서 바다가 철썩거리던 그 목로주점에서 산새 울음소리 같은 뱃고동 소리를 듣곤 했던 명준은 그 선술집 주인을 통해 이북으로 다니는 밀수선에 대한 소리를 들었었지. 이곳에서 이명준이 찾고자 했던 '광장'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쓰는 작업은 부질없어 보인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부두풍경 뿐만 아니다. '광장'이 발표된 때가 1960년이었으니 꼭 41년이 흘렀건만, 소설이 세상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태, 우리는 분단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져 반세기 동안 헤어져 살아온 남과 북의 가족이 만나고, 금강산을 자유로이 여행하는 세상이 됐다.

최인훈(광장) 촬열장이미지 인천 역시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대치의 현장에서 북으로 가는 길목으로 통일시대의 중심지가 될 꿈에 잔뜩 부풀어 있다.


이 즈음에 읽는 '광장'은 평화와 화해의 시대에 '이념'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준다. 민족을 남북으로 가른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속에서 앞으로 맞이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분단상황이 해소되고 이데올로기로부터도 해방되고 나서도 '광장'은 여전히 읽힐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정황에서나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의무로서 지워질 사랑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평론가 김병익)." 바다바람을 좀 더 쐬어 볼 겸 연안부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70년대에 매립이 된 이곳은 명준 시절엔 그저 맨 바다였다. 벤치며 가로등이며 한껏 멋을 낸 부두 앞 공원엔 칼바람이 일지만, 젊은이들은 항구 쪽을 향해 서서 바람을 맞고 있다.


사랑을 하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이천년 대의 젊은이는 이념과 사랑 앞에 늘 그렇게 당당하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준 은혜와 그의 뱃속의 딸과 만나기 위해 명준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찾아간, 바로 그 '바다'이다. 그러고 보니, 명준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아니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다, 그 물빛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