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저자 조우성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1 02:06:45
'인천 이야기' 저자 조우성
향토애와 국제감각의 멋들어진 어울림
(인천=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 인천의 한 향토사 연구가가 펴낸 책이 조용히, 꾸준히 팔리고 있다.
조우성(趙宇星)의 '인천 이야기 100장면'(인아트. 304쪽. 1만5천원). 특정 지역에 관한 이야기인데다 이미 현지 신문에 연재됐던 짤막짤막한 글들의 모음인데도 서점가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저자가 서점에 나타나면 주인이 허리 굽혀 인사할 정도로 불황의 서점가에 은근히 효자 노릇을 해주고 있다.
이 책은 개화기 이래 인천의 다양한 문물과 장소, 인물, 풍속 등을 소개하면서 그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부담없는 문체에 고증이 성실하고, 게다가 저자의 관점이 뚜렷하다. 한 지역의 화제를 넘어 우리 개화기의 이야기요, 근대의 담론을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하기야 경주를 빼놓고 신라 천년을 말할 수 없듯, 인천을 빼놓고 근대와 개화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실 인천은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라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니다. 어딜 가나 풍물이 비슷비슷한 한국 땅에서 인천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주나 부여 같은 고도(古都)의 이미지 대신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근대의 풍경'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구석구석에 스며나는 이국정서와 국제적 역사배경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천은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비문화적인 도시다. 인구나 경제규모 등을 감안하면 '몰문화적'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만큼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무심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 지역의 문화운동이나 향토사 연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별로 팔릴 것같지 않던 '인천 이야기 100장면'같은 책이 의외로 인기를 끄는 것은 이제 삭막한 비문화도시 인천이 서서히 각성을 시작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인천과 근대
서울의 관문인 인천은 구한말 국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높은 도시였다. 한반도 최대의 항구였고,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이 조계지를 형성해 살던 곳이다. 서양식 호텔, 성냥, 사이다, 기상대 등 수십 가지의 '한국 최초'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당시 '인천 최초'는 자동적으로 '한국 최초'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와 너무 가까운 탓에,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 이후에는 무역항으로서 기능이 현저히 감퇴하면서, 오랜 세월 잿빛 그림자가 도시 위에 드리웠다.
게다가 토박이가 적고 여러 지역 출신들이 모여 사는 '인천합중시'이다보니 정체성도 상대적으로 희박하고 향토문화에 대한 애착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이 합중성(合衆性)을 인천의 정체성으로 끌어안으면서 역설적으로 인천문화에 애착하는 문화운동가, 연구가들이 있다. 조우성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1948년생인 그는 대학(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후 국어교사로 출발해 지역신문을 거쳐 지난 95년부터 다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일관되게 집착하는 일이 인천 관련 자료수집, 인천역사 정확히 밝히기, 인천문화 되살리기이다.
그는 현재 인천과 관련된 사진자료를 2천점 이상 가지고 있다.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것, 주변에서 제공해주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구입한 것이다. 일본에는 친구들이 있어 인천 관련 자료가 나오면 연락을 해주고, 도쿄(東京)의 고서점가 간다(神田)에는 수시로 드나든다. 빌 게이츠가 세운 코비스(Cobis) 사진재단에서도 인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인천이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보니 자료도 주로 구한말의 것이 많습니다. 근대사 자료 수집가들은 제물포(인천)라고 하면 관심이 크죠."
우표수집가들에게도 인천은 관심 대상이다. 한국 최초의 우표는 서울의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에서 동시에 발행됐다. 당시 인천분국장은 월남 이상재. 그러나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우정업무가 중단되는 바람에 이 시기 우표의 희소가치는 엄청나다는 설명이다.
한 번은 런던의 고서점에서 그의 인천 옛집을 발견한 적도 있다. 어떤 책에 실린 미군들의 진주 모습인데 어린아이가 길거리에서 울고 있고 그 뒤로 '유토피아'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건 선친이 운영하던 다방이었다. "어 이거 우리 집인데..." 주인은 책값을 깎아주었다.
◇지역신문 기자의 열정
그가 이런 일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인천 경기매일신문의 상무를 지냈던 선친의 영향이 컸다. 대학생이던 1960년대 중반, 그는 아버지를 도와 경기매일신문의 문화면 꾸미는 일을 도맡았다. 동양통신이나 합동통신 같은 당시 뉴스통신사들의 문화뉴스를 참고해 지면을 구성하는 일을 대신했던 것.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한국문인협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던 선친(조수일. 趙守逸)은 또 사진을 좋아해 전설의 명기 라이카M2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사진자료가 중요하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머리에 젖어들었다.
그는 은사인 박목월의 추천으로 시전문지 `심상'을 통해 등단했고(그후 지금까지 시집 세 권을 냈다), 아버지처럼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 스승 등 주변의 모든 이들이 기자의 길은 험하고 거칠다며 말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교사가 됐다. 그러고 나서 15년여. 뭔가 변화를 찾던 그에게 옛날의 꿈인 기자생활을 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88년 인천일보 창간 멤버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는 문화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지냈다.
인천에 대한 사랑과 기자정신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파이팅'을 외친 것일까. 그는 언론계 시절을 포함,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거나 바로잡았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지역의 3.1운동 실태. 언젠가 무슨 기념식장에서 "우리 인천은 3.1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점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시 고위 관계자의 연설을 듣고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료를 뒤지기 시작한 결과 무려 한달이상 격렬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 땅 바깥에서는 유일하게 조병창(무기제조창)이 있던 이 민감한 지역에서 한달이나 독립운동이 계속됐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왜 그런 일이 제대로 전해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글쎄, 그게 인천의 약점이에요. 토박이가 적어서 그런지..."
제 고장만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폐쇄성과 배타성이 조장되는 것이 대부분 지역의 문제라면 인천은 거꾸로 지역성이 너무 희박해 걱정이라는 것이다.
"iTV가 개국하던 날 교무실에 교사 20여명이 있었는데 정작 개국 장면을 시청하는 사람은 셋뿐이었어요. 말로는 인천에도 방송이 생겨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었지만 정작 깊은 관심은 없는 거죠."
◇지역사 무시하는 한국사는 곤란
그는 1999년 뜻을 같이하는 몇몇 재야사학자, 문인, 기자와 어울려 인천학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공동집필로 '간추린 인천사'라는 책도 냈다.
"사실 우린 정통 사학자도 아니고 전문학자도 아닙니다. 특히 제 경우엔 향토사학자라는 이름도 싫고, 그냥 딜레탕트일 뿐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을 안하니까 우리라도 먼저 하겠다, 그러면 우리 모습을 보고 언젠가 그들이 제대로 할 것 아니냐, 그런 심정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 '월미도 이야기' 등 몇 권을 공저 혹은 단독으로 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메아리를 울린 것일까. 얼마 후 인천대학교에 '인천학연구원'이 생겼고 바로 얼마 전엔 인하대 사학과 출신들이 모여 '인천사연구소'를 만들었다.
"지역대학은 지역연구에 헌신해야 합니다. 인천대도 그렇지만, 더구나 인하대는 하와이 동포들이 만들어준 학교 아닙니까. 당연히 인천연구에 앞장서야죠."
알다시피 인하대학은 하와이 동포들이 그들이 배타고 떠났던 인천을 위해 무언가 헌신하자는 뜻에서 성금을 모아 세운 학교다. 그래서 이름도 인천과 하와이에서 한 자씩 따다가 지은 것.
조우성의 선배세대 가운데는 '인천석금'(仁川昔今)을 지은 언론인 고일(高逸),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 최성연(崔聖淵), '인천 한 세기'를 남긴 신태범(愼兌範) 박사 등이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는데, 고일은 시대일보 인천지국에 근무하면서 직접 본 이야기를 야사체로 썼고, 시인이기도 한 최성연은 인천의 가장 큰 특징인 서양건축물들의 역사를 정리했다. 경성제대 출신인 인천의 의학박사 제1호 신태범은 쉽고도 유려한 필체로 일제와 광복 이후까지의 인천 모습을 그렸다. 그는 원로 재불화가 이성자 여사의 남편이기도 했다.
그밖에 문학평론가 김양수(金良洙)의 '인천개화 백경(百景)' 등 관련서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본격적인 지역학 차원의 저작들은 아니다. 더구나 개화기에서 광복 때까지가 대부분이고 고대나 중세에 관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한 것이 큰 아쉬움이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들이 진작에 들러붙었더라면 인천사, 나아가 한국사 기록의 오류를 상당부분 바로잡았을 것이라고 그는 아쉬워한다.
"잘못된 기록이요? 한둘이 아니죠.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이 고종 황제였다는 건 틀린 이야깁니다. 인천 사람들이 먼저 마셨어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이 아니라 인천의 대불호텔입니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숙박했어요. 혹시라도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곳이라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정직한 역사기술 태도는 아니죠. 최초의 근대식 극장은 인천의 협률사(후일 축항사로 개명)입니다. 명백한 근거기록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철도의 시발지가 노량진이라는 정부 공식기록에 이르러서는 아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다.
"뉴욕 브룩스사가 제작한 열차를 분해해 배에 싣고 제물포(인천)항으로 왔습니다. 당연히 제물포 부두에서 조립했죠. 철로도 물론 인천 쪽에서 먼저 만들어 나갔구요. 철로공사 기공식도 인천에서 했죠. 1899년 경인선 개통식 때에는 인천에서 열차를 몰고 영등포에 가 고관대작들을 태우고 다시 인천으로 와서 개통식을 한 뒤 노량진까지 시운전을 했습니다. 독립신문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연전 미국 덴버 철도박물관에 가보니 당시 운행했던 첫 열차의 사진이 아주 좋은 상태로 보관돼 있더군요."
그런데도 노량진에는 한국철도 시발비가 세워져 있고 한국철도공사가 발행한 한국철도사에 관한 책도 노량진이 시발점이라고 돼 있다.
이 모든 것이 제도사나 정치사 위주로 흘러가면서 생활사와 문화사를 등한시하는 공식역사 편찬자들의 태도 탓이라고 그는 꼬집는다. "서울 중심의 역사만으로는 결코 포괄적인 한국사를 쓸 수 없죠. 사실(史實) 자체가 틀렸는데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정확한 지역사들이 모여 한국사를 구성하는 것 아닙니까."
◇인천의 '최초ㆍ유일'을 살려야
그는 올봄 '20세기 인천문화 생활연표'라는 책을 냈다. 근 10년에 걸친 수집과 조사확인의 결실이다.
카드 수만장을 만들어 관련 사항이 눈에 띌 때마다 기록해넣었던 것을 책으로 정리했다.
"일본에 자주 갑니다. 조그만 고장엘 가도 안내책자와 지도, 출향인사들에 대한 소개 등 지역 알리기 노력이 대단해요. 국민소득 3만 달러와 1만 달러의 차이가 바로 그런 것이겠죠, 흔히들 전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한국 뿐이라고 하는데, 우습게 보더라도 뭘 알고 우습게 봐야죠."
그의 열성은 자료수집이나 연구에 그치지 않는다. 기자 출신답게 현장에 강하다. 해반문화사랑회 등 시민문화운동단체들과 힘을 합쳐 중앙동 일본인 조계지의 창고들을 예술촌으로 만들자는 '예촌 캠페인'을 추진, 결국 시가 이같은 계획을 확정하도록 했다.
요즘은 중앙동 관동 일대 1920-30년대 일본가옥촌을 보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그만이다, 차이나 타운은 세계 도처에 있어도 재팬 타운이란 건 별로 없다, 더구나 옛 가옥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건 대단한 관광자원이다... 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천에는 '한국 최초'가 한둘이 아닌데, 그것들만 잘 살리고 연구해도 역사적 가치는 물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
개신교회 기상대 외국무역상사 해군사관학교 성냥공장 사이다 자장면 쫄면 우정분국(서울 우정총국과 동시개설) 전화(서울-인천 동시개통) 고속도로(서울-인천) 등대(팔미도 및 소월미도) 서양식호텔 커피 영화상영 등등.
인물도 많건만 어쩐 일인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장면(내각책임제 당시 국무총리) 조봉암(이승만의 정적) 이승엽(공산당 서울시당인민위원장. 북한 부수상 지내다 숙청) 등 정치인을 비롯해 문화예술계에도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했다.
김동석(월북 문학평론가) 김은호(화가) 김준근(구한말 풍속도로 조선을 세계에 알린 화가) 유희강(서예가) 고유섭(최초의 미학자, 미술사가) 임영방(미술사) 김상유(상파울루 비엔날레 판화부문 대상 수상) 박영성(수채화) 김활란(교육자) 김학준(동아일보 사장) 김영수(전 문화체육부장관) 함세덕(희곡작가) 이흥우 낭승만 장석남(이상 시인) 우선덕(소설가) 이환경(방송작가) 최원식 조남현(문학평론)이광규(문화인류학자) 박두성(남북한 공용 한글점자개발. 맹인들의 세종대왕) 이찬진(한글과컴퓨터설립자) 한상억/최영섭(가곡 '그리운 금강산' 작시/작곡자) 김진원(성악가) 박규채 박정자 최불암 전무송(연기자) 송창식(가수) 등등... 그렇지만 동상이나 기념비 하나 변변한 게 없다.
"인천은 좀더 지역화돼야 합니다. 흔히 영호남을 예로 들면서 지역감정 조장하지 말라고 하지만 거꾸로 인천은 지역화가 너무 안돼서 발전이 느립니다. 어느 정도 결속력은 있어야 하는 건데, 너무 온건 합리적이라고 할까요? 인천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똘똘 뭉치고 싸우고 속이고 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성향의 소유자들입니다.
광역시마다 국립대학이 다 있는데 인천엔 없어요. 환란 때 인천의 금융기관이 무려 여섯 군데나 사라졌습니다. 재무구조가 더 취약했던 다른 지역 은행들은 그냥 넘어갔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역과 대등하게 가려면 좋든 싫든 최소한의 정치적 결속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부정적 의미의 지역색하고는 다릅니다. 지역 자체가 권력을 창출해야 대외적으로도 힘을 갖게 됩니다. 진정한 네트워킹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선 공동체의식이 필요하고, 공동체의식을 지니려면 역사체험과 문화를 공유해야 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이 인천 사람들의 공동체의식 형성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군요."
그가 괜한 일에 돈 쓴다고 주변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혼신의 노력으로 모은 사진자료를 모두 홈페이지에 올려 여러 사람이 공유하도록 하려는 것도 그런 노력의 연장이다. "내 사진 마구 가져다 쓰면서 사용료는커녕 제공자 이름도 안 밝히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인천 알리기나 '인천의식' 함양에 일조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를 믿어도 될 것같다. 인천을 격정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지역인사' 특유의 편협성이 감지되지 않고,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인정하되 맹신하지는 않는 세계의식을 믿어도 좋을 것같다. 그의 시가 노래하듯, '무변광대'의 마음을 믿는다.
겨울/안개/자옥히/해송(海松)을 껴안고,//북장자서(北長子嶼)/등표(燈標)가 히끗/히끗 백두(白頭)처럼/다가왔다//인간사/동서남북/거친 파도 출렁이는/바다라지만,//어둔 밤/100만 촉광으로/제 눈을 태워 길 밝히는/등명기(燈明機) 하나.//이 능선을/오르면 공수래,/내리면, 그냥 그렇게/공수거라지만//오늘/등탑(燈塔)에 서니/바다도, 나도, 모두/무변광대(無邊廣大)다. (시 '팔미도' 전문. 북장자서는 팔미도 앞의 암초. 등표가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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