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 이야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1 02:08:12
수도국산 이야기
<수도국산 달동네>...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
성당 2층 창너머로 보이는
황토 빛 저 흙더미속엔
내가 살던 집이 묻혀있다.
내 아이의 어줍잖은 그림도
깨진 항아리도
낡아서 버린 구두도...
수퍼, 약국, 목욕탕, 연탄집
모두 저 황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민희네, 정우네, 광수네, 선진이네...
저녁 어스름 해 기울고
황토는 말없이
세월을 삼킨다
송현동 수도국산에 몸 부비고 살았던
허선화 님의 시 '수도국산 달동네' 전문이다.
수도국산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님은 말한다. 송현동을 떠나온 후 자꾸만
발길은 수도국산을 향한다고...
예전에 살던 동네 어귀에서 멈춰 선다고,
하늘 높이 오르는 새 건물들을 올려다 보지만,
뜻 모르는 슬픔 남아 온몸을 戰慄케 한단다.
어쩌면 가난했지만 마음 따뜻했던 그 시절이,
그 사람들이 그리운 건 아닐까
(김철성 kcs1025hanmail.net 글쓴일 2002년 8월 27일 16시.인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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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인천이야기-16,경인일보)
인천시 동구 송현동 44번지 일원. 인천인들은 이 곳을 『수도국산』이라 부른다.
수도국산의 옛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었다.
산 언덕에 소나무가 많아 불린 이름으로
소나무 언덕이란 의미의 송현(松峴)이란 지명도 송림산에서 비롯됐다.
이 곳엔 또 아카시아와 벚나무가 우거져 있어 꽃피는 철이면 주민들이 즐겨 찾기도 했다.
수도국산이란 명칭은 멀리 구한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들이 인천과 한강의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벌인 뒤
1909년 인천지역에 수도물을 공급하면서 부터다.
당시 산 꼭대기에 배수지를 설치, 노량진 수원지에서 원수를 공급받아
수도물을 담아두었는 데, 그를 두고 수도국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인천에 상수도가 처음 공급되면서 고유의 산이름까지 몰아낸 셈.
수도국산에 본격적으로 동네가 형성된 것은 항구가 열리던 무렵,
일본인들에게 @겨난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부터로 전해진다.
인천의 언론인 故 高逸선생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따르면
1900년대 초 일본군이 지금의 전동근처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송현동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이어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북에서 피난내려 온 이들이 대거 몰렸다.
70년대 이후엔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실향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고
호남·충청지역 사람들이 찾아 뿌리를 내렸다.
이렇듯 「강제개항」과 함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도국산은 인천인의 고향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주거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고 주민들도 대부분 영세민이어서
나라안에서도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혔을 정도였다.
수도국산 동네에 살았던 姜모씨(71)는
『예전엔 끼니와 잠자리 해결이 가장 큰 문제였으나 소득이 좀 나아진 80년대 초부터는
열악한 주거환경이 심각한 생활불편 문제로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그럴만도 했다.
5만5천여평의 산 비탈에 무려 3천여 가구의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주민들은 늘 붕괴위험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 폭 1m 가량에 불과한 좁은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손수레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지난 88년에는 수도국산에 5일째 물이 나오지 않자 주민들이 줄지어
동네 아래로 물통을 들고 내려가 급수차에서 물을 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구청에 수도국산을 주제로 그린 작품을 기증한 한국화가 鄭錫元씨(46)는
『도시계획선을 그으면서 도로가 건물을 침범하자 한 주민이 도시계획선을 피해
집을 개조한 모습이 하도 기발해 화폭에 담은 적도 있다』며
『도시가 팽창하면서 부평이나 주안 등 신흥개발지로 빠져나가지 못한
수도국산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수도국산은 이렇듯 서민들의 애환을 곳곳에 담고 있는 동네였다.
몇년전 까지만 해도 조그만 공터에선 고추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대문앞에 내놓은 꽃화분은 「달동네」의 운치를 자아내기도 했다.
吳光哲 칼럼집 「장미를 주는 손」에서 저자는
『···골목을 생활무대로 수도국산 사람들은 정답게 살아간다.
다닥다닥 지붕으로 머리를 잇고 골목길을 사랑방 삼아 정리를 나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도국산은 연극무대로도 등장했다.
지난 90년 수도국산을 소재로 한 인천의 연극 「아버지의 침묵」이
전국연극제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도시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수도국산
[달동네」를 배경으로 도시빈민들의 아픔과 모순을 고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수도국산도 거센 변화의 물결 앞에선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는 2001년까지 불량주택 1천7백80동을 철거하고 아파트 3천여 가구분을 짓기 위한
전국 최대규모의 「송현지구(수도국산)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도국산엔 지난해 말부터 철거작업이 진행되면서 주민들이 모두 떠났다.
집을 허문 자리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이제 수도국산의 역사는 기록에서나 찾아 보게 됐다.
다행히 이런 역사적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동구청 직원을 중심으로
「수도국산 물품」을 수집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이들이 철거현장에서 수집한 물품은 그림을 비롯 수도국산 주소를 새긴 문패,
수도국산 지번을 적은 보안등 표시판, 붓글씨로 운치를 낸 문짝 등 50여점에 이른다.
동구는 자료를 더 모아서 「달동네 박물관」이 생기면 전시할 계획.
얼마전 인천에서 사진전시회가 열렸을 때 초대장에 넣었던 인사말은
인천인들에게 다시 한번 수도국산의 「향수」를 잔잔하게 불러일으킨다.
『집집이 풍겨나오는 따뜻한 밥내음이 아릿한 변소내음과 섞여
당신을 향수에 빠지게 하는 곳, 언제 어느 모퉁이에서
올린시간 : 1999-06-22[]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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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송림동-안송림
안송림 백서 {인천일보 7/22 제 4268 호]
송림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 지역으로 수도국산이라 불리는
만수산 일대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1896년 지방제도를 제정, 전국의 행정구역을 13도 8부로 정할 때 인천부의 관할면은
다소면을 포함하여 10개면이었으며 다소면내 동리에 송림리가 포함되었다.
비로소 그때부터 송림이란 명칭이 행정동명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후 1914년 다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새말 매하지 샛골 장승거리 활터고개를 병합,
송림리라 했다.
지금 시민중에 그런 지명을 알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여겨지는데
새말은 송림 바깥쪽의 새로 생긴 마을이었으며 장
승거리는 마을입구에 장승이 서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샛골과 활터고개는 지금도 더러 불리는데 마을과 마을의 사잇골이라는
샛골은 지금의 도원역에서 송림로터리로 가는 도로의 우측 일대 배밭이 있었으며
활터고개는 예전 활터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지금의 서림초등교 옆으로 오르는 언덕으로 헐떡고개라고도 했다.
그러나 송림이라는 지명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불리던 이름이다.
1789년(정조 13년) 조사된 호구총수 인천편에 16개면 76개리가 기록된 중에
송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842년 발간된 `인천부읍지""의 다소면에 10개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에 송림리가 나오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을 위한 지명조사 자료의 다소면 동리 이름에
송림리 산이름으로 만수산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송림동은 6개동으로 분동되어 있고 그중의 2동은 동구청의 소재지로 옛 안송림 일대이다.
안송림이란 송림의 안쪽 마을이란 뜻이다.
송림2동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민자치백서를 냈다.
지역 역사와 현황, 실적 등을 싣고 백서의 서두는 `안송림 주민자치 헌장""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유서 깊은 동구 안송림 주민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화합하고 번영하는 고장을
만들기 위하여 이바지하는 주민으로서 이 헌장을 마음에 새겨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주민들 스스로 동민임을 자랑으로 여길 때 살기 좋은 안송림이 될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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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동네 박물관//-인천이야기/
송현동은 대표적인 한국인 삶터
‘보통사람들의 역사’를 조명해야
역사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시대와 장소와 보는 눈에 따라 선택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과거 우리가 배운 역사는 왕과 그의 신하들이 행한 치적과 제도의 변천,
문물의 발달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백성들은 국외자였다.
역사 성립 요건의 하나인 '기록'과 그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반성이 오늘 세계에 두루 일고 있다.
'파라오' 발굴이 고고학의 주 대상이었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내다버린 쓰레기더미에서 역사를 찾아내려는
'쓰레기 고고학'이라는 학문 분야까지 생겨난 것이다.
이는 역사의 실질적 주체가 '보통사람'이라는 진보된 인식의 결과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인천에서도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개항 직후 폭증한 인구의 유입 과정과
그들의 정착 실태에 관한 '기록'을 천착하는 것도 생생한 지역사 현장을 찾아가는 작업일 터이다.
인가가 띄엄띄엄 있던 작은 어촌
제물포가 1924년경에 이르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기타 외국인 등
총 4만1012명이 모여 사는 식민적 이국 도시로 급격하게 변모하게 되는데
이 때의 여러 사회상은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의 실상은 주요 관심사이다.
당시 한국인은 탁포(坼浦=터진개), 답동, 용동, 화개동 등지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본인이 증가하자 전환국(옛 인천 여고자리)과 화평리 방면으로 밀려났다.
일본인에게는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노동권을 잃은 처지가 돼
마침내 지금의 송현동, 송림동 등 신설 부락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울퉁불퉁한 산비탈, ‘게딱지’같은 초가들은
1960년대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빈민촌으로 남았었으나,
현재는 대단위 아파트 촌이 세워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곳 송현동 '수도국산' 일대에 살았던 주민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낯선 땅 인천으로 이주해 왔던 개척자적 선대들의 자랑스런 후예였던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인천시 동구청이 가칭 '달동네박물관'을 개관하리라는 것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단순한 호사 취미에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편린들'이 한국 근·현대 생활사 자료로서
이 박물관에 정겨운 모습으로 공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조우성/광성고교사 ) 2002-08-30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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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건립추진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혔던
수도국산의 역사적 자취를 간직할 「달동네 박물관」(가칭)이 동구에 들어설 전망이다.
동구는 최근 「인천시동구발전포럼 연구성과물」로 선정된
「송현동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수도국산)내 달동네 박물관 설치건」을
구 역점사업으로 선정해 추진키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달동네 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과 함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인천인의 애환을 담았던
수도국산의 역사적 자취를 보존하고 동구의 이미지 및
문화경쟁력을 제고한다는 게 구의 방침이다.
구는 이에따라 송현동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추진중인 대한주택공사와 협의,
건립을 유도하거나 박물관 부지를 확보한 뒤 시에 예산지원을 건의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또 공공근로자를 투입, 각종 사료를 수집하는 한편 인천시민을 대상으로
동구관련 사진 및 자료와 박물관의 명칭을 공모키로 했다.
구는 수도국산의 철거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해 말부터
金철성씨(36·문화공보실 근무) 등 직원들을 중심으로 「수도국산 물품수집작업」을 벌여
수도국산의 주소를 새긴 문패와 수도국산 일대 지번이 적힌 보안등 표시판,
붓글씨로 운치를 낸 문짝 등 50여점의 사료들을 수집해 놓은 상태다.
특히 수도국산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한 중견화가 鄭錫元씨(46)는
인천시 미술대전 공모전 우수작 수상작인 「생활주변」 등
수도국산의 풍경을 담은 자기 작품 4점을 구에 기증하기도 했다.
구 관계자는 『아직 예산확보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구체적인 사업시기는 결정하지 못했으나
면밀한 준비작업을 거쳐 빠른 시일 안에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林星勳기자·hoon@kyeongin.com
올린시간 : 199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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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 수도국산일원 환경개선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인 동구 수도국산 일원 5만4천여평이
2만2천여평의 근린공원을 갖춘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새롭게 단장한다.
주택공사는 9일 오전 인천시 동구 송현배수지 주차장에서 徐廷華국회의원,
金昌洙동구청장, 金永柱시의원을 비롯한 주민 등 6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 송현 주거환경개선사업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지난 94년 사업지구로 지정된 인천시 동구 송현 1·2·3동 및 송림1동 일원
총 5만4천1백54평의 송현지구는 도시영세민이 밀집한 표고차 50여m의 구릉지로
시내 다른지역에 비해 크게 낙후돼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요구됐던 지역.
4천7백10억원을 들여 지난 96년부터 사업에 착수,
오는 2003년 12월 준공 목표로 사업이 진행중이다.
이날 설명회에선 총 부지중 절반에 가가운 2만2천여평의 공원을 갖추고
2만8천4백여평의 부지에 2천7백25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토지이용계획이 발표됐다.
특히 국내 주거환경개선 사상 가장 큰 규모로 관심을 끌었던 만큼
자연친화적 개발에 역점을 둔 것이 특징.
사업성사를 위해 1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 온 徐廷華의원은
『도시영세민을 위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주민들에게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는 사업』이라며
『동구 송현2동 일원의 수문통지구 등 달동네 개선을 위한 주거환경개선사업 추진과 더불어
연말로 시한이 만료되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을 5~10년 더 연장, 주민혜택의 폭을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李榮宰기자·younglee@kyeongin.com
올린시간 : 199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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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송현재래시장 존폐위기 <현장에서 임성훈_사회 2부>
『양손에 찬거리를 들고 힘겹게 수도국산의 고갯길을 오르던
아주머니의 뒷 모습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요즘 동구 송현동 송현재래시장은 아주 침울한 분위기다.
주고객이었던 수도국산 주민들이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인해 모두 떠나버렸기 때문.
이 시장은 60년대 초 수도국산에 터를 잡은 황해도민 등을 상대로
농산물과 생필품을 팔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재래시장으로
현재 1백50여개 점포에 1백90여명의 상인들이 입주해 있다.
비록 정식으로 허가가 나지 않은 무등록 시장이지만
웬만한 생필품은 손쉽게 구할 수 있어 1만여명에 달한 수도국산 주민들에겐 소중한 존쟁였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철거작업을 시작해 주민들이 가이주단지 등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존폐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로 점포마다 매출은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수개월째 임대료조차 내지 못하는 상인도 부지기수다.
여기에다 수도국산 공사현장에서 날아드는 먼지와 소음 등으로 인해
상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
이에따라 주민들은 지난 4월 번영회를 결성하고 관할 동구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구로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빈민을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구제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
또다른 도시빈민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영세민들은 개발의 명분아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게 우리나라 주택정책의 현주소지요』
이 곳에서 17년째 신발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金모씨(55)는
『오는 2002년 6월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완료돼 주민들이 다시 입주한다지만
그때까지 버틸 여력이 없다』며 『사업전에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공청회를 여는 등
정부가 조금만 배려를 했더라도 사태가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林星勳기자·hoon@kyeongin.com> 올린시간 : 199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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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가옥철거 막바지진통
동구 수도국산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의 가옥철거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철거용역회사 직원이 철거과정에서 다치는 가 하면
철거대책위원 및 주거연합 등도 피해를 주장하며 항의집회를 갖기로 하는 등
막바지 진통을 겪고 있다.
10일 인천동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7일 오전 수도국산 재개발 공사현장에서
李모씨(38)등 철거용역회사 직원 4명이 철거대책위원인 金모씨(34) 등과
몸싸움을 벌이던 중 상처를 입은 것과 관련해 공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하고 있다.
직원들은 이날 빈집을 철거하기 위해 살수작업을 하던 중 金씨 등이
쇠파이프를 들고 와 폭행, 각각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金모씨(34)등 철거대책위원과 주거연합 등도 철거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
11일 「송현동 가수용단지 쟁취, 폭력만행 규탄대회」를 갖기로 하고
9일 동부경찰서에 집회신고를 냈다.
金씨 등은 이날 오전 인천지검을 항의방문한 뒤 공사현장에서 농성을 벌일 계획이다.
수도국산엔 현재 총가옥 1천7백80채중 92%인 1천6백29채가 철거된 상태로
아직 7가구가 잔류해 있으나 철거대책위원중에선 세입자 金씨만이 혼자 남아 있다.
<林星勳기자·hoon@kyeongin.com> 올린시간 : 199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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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수도국산 물품수집작업
『우린 이렇게 살았다.』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과 함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혔던
인천시 동구 수도국산의 역사적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구
청 공무원을 중심으로 「수도국산 물품 수집작업」을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 전국 최대 규모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수도국산(송현 1·2·3동, 송림 1동)은 5만5천평의 면적에
1천7백80채의 노후가옥이 밀집해 있던 「달동네」.
이 사업이 마무리되는 오는 2001년말 3천여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서면
인천시민들의 애환이 진하게 서려 있던 옛 자취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수도국산엔 특히 개항 초기 일본인들에게 쫒겨난 한국인들이 모여들어 동네를 이루며 살았고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이북의 실향민들이 월남해 머무르는 등 인천인들의 「고향」으로 통했다.
지난 90년에는 도시빈민들의 아픔과 모순을 고발해 대통령상을 차지한 연극
「아버지의 침묵」(윤조병 연출)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나
철거작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주민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이처럼 인천인과 질곡의 세월을 같이 한 수도국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자
동구청 金철성씨(36·문화공보실 근무)등 구청 공무원과 주민 등 몇명이
그 흔적들을 역사자료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발벗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수시로 짬을 내 수도국산의 빈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촬영과 함께
집주인들이 버리고 간 물품 가운데 역사적 가치가 있을 만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있다.
金씨 등이 철거작업이 시작된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모은 물품은
수도국산의 주소가 새겨진 문패와 수도국산 일대 지번이 적힌 보안등 표시판, 붓글씨로 운치를 낸 문짝 등 50여점.
이 중에는 수도국산의 정경을 그린 중견화가의 그림도 몇점 포함되어 있는 데,
현재 화가의 소재를 파악중이다.
金씨는 『인천 역사의 현장인 수도국산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보존해
우리가 살아 온 모습을 후손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해
수집작업을 시작했다』며
『달동네 박물관이나 사료관을 세워 수집한 물품들을 전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林星勳기자·hoo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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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수도국산 철거놓고 마찰
전국 최대 규모의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인 동구 수도국산(송현 1·2·3동, 송림1동) 일대에
요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본격적인 철거작업을 벌인 뒤 철거반원과 잔류 주민들간 마찰을 빚는 가운데
지난 11일에는 몸싸움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사업주체와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93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된 수도국산은
5만5천평의 면적에 1천7백80동의 노후가옥이 밀집한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
그러나 사업이 완료되는 2001년 말에는 이곳에 3천여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이곳 주민들의 97%는 보상협의에 응해
청학동, 만수동 등 시가 지정한 가이주 지역 등으로 옮겼으나
30여 가구 주민들로 구성된 철거대책위원회 소속 주민들이 남아
보상협의에 불응하며 가옥철거를 저지하고 있는 상태다.
대책위 소속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거주할 수 있는 가수용 단지를 사업지구내에 마련해 달라는 것.
사업주체인 시와 주공측에서 주거대책비를 제시하고 있으나
생활권이 동인천 주변이어서 이 지역을 떠나서는 생활할 수 없다는 게 이들 주민의 주장이다.
주민들은 또 『타지역으로 이주하더라도 대부분이 영세가옥주인 처지에서
현재 책정된 감정가로는 주민들은 전세에서 월세로,
이후에는 이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하게 된다』며 우려하고 있다.
이에대해 주공은
『사업지구 인근에 가수용 단지를 건설할 만한 부지도 없을 뿐더러
지구내에 가수용단지를 마련하는 것도 토목공사 등 전체공사에 지장을 초래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미 가이주 지역으로 이주한 주민들과의 형평성을 위해서도
지구내 가수용시설 설치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수도국산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지난 11일 주민과의 마찰을 계기로
절반 가량만 가옥철거작업을 진행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주공은 강제철거를 검토중인 반면 주민들은 규찰대를 구성,
순찰을 도는 등 가옥철거에 대비하고 있어 빠른 시일내에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한 수도국산 사태는 더 극한 상황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林星勳기자·hoon@kyeongin.com>올린시간 : 1999-01-21[]
출처 블로그 > 현대차문학 / 이경래 011-210-4004
원본 http://blog.naver.com/lkr0412/90004190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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