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최초의 학생조직 한용단
仁川愛/인배회
인천최초의 학생조직 한용단
인천 최초의 학생 조직은 1911년께에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인 한용단을 그 기원으로 한다.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 통행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1910년부터이다.
당시 인천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는데 보통학교 이상인 학교가 인천상업학교 하나밖에 없었고 경인선 개통과 높은 교육열 등이 서울로의 통학을 가능하게 했다.
한용단의 탄생은 1919년 11월 13일자 매일신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는 `한용단조직 인천의 청년들이 모여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베이스볼과 풋볼을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한용단의 성격은 회원이었던 고일씨의 회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한용단의 어머니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청년을 아들로 탄생했으니 운동 경기를 외피로 한 그 핵심은 민족 해방 정신을 내포한 문학운동으로 전개했었다”고 밝혔다.
또 “작년 봄에 세워… 그 당시에 만세 소요로 인해 중요한 임원들은 모두 철창 아래엽라고 밝혀 민족 해방 정신을 내포한 문학 운동을 전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1920년대 초반 인천지역의 청년운동은 엡윗청년회, 인배회, 한용단 등을 중심으로 강연, 토론 등을 통한 지식 계발, 체육활동을 통한 체력 증진, 풍습 개선 등의 활동을 주로 하는 민족개량주의적 청년 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인천시사의 기록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이뿐 아니라 한용단은 인천의 야구의 모태 역할을 했으며 축구의 발전에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고유섭, 갈홍기, 조진만, 임영균, 홍이표, 최영억, 장대진, 강흥석, 진종혁, 박태성, 서정익, 임종성, 임정록, 이상태, 이상용, 이극남, 고일, 한만억, 박칠복, 이인학, 강신혁, 이비도, 이대근, 심의균, 차태열, 이형식, 소희련 최봉기 등이 초기 멤버이고 신태범, 이유선, 배인복, 장영순, 박갑봉, 최상풍, 장극, 김동석, 이석범, 박염진 등이 뒤를 잇는 회원이었다.
초대 경인기차통학생 회장은 곽상훈이 맡았으며 여성으로는 서상집 감리의 딸 은주, 이도라 등이 처음으로 기차 통학을 해서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여자 아나운서 1호 이옥경 (0) | 2023.03.31 |
---|---|
인천이 원조 ‘성냥공장’ (0) | 2023.03.24 |
인천 창고 영업의 효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인천출장소 (0) | 2023.03.23 |
근대적 상설시장 신포 생선전 (0) | 2023.03.23 |
최초의 신식 소주 제조회사 조일양조주식회사 (0) | 2023.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