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상설시장 신포 생선전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근대적 상설시장 신포 생선전
최근 수년 동안 대형 할인마트가 많이 생겨 재래시장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 자치단체 등에서는 다양한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전히 재래시장은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인식으로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천에 3일장이니 5일장이나 하는 정기 시장이 아닌 근대적 상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1895년께부터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정흥택, 정순택, 정세택 형제가 터진개 선창가였던 옛 신포수퍼마켓 자리에 한옥으로 건물을 짓고 생선전인 이른바 어물객주를 차리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객주가 후일 신포시장의 명물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생선전의 시초이다.
일본은 1887년 6월 각종 어류가 풍부한 경기 화성과 강화 근해에서 어로행위를 인정받고 판매권을 따냈다.
일본 어민들은 우리 어선과 달리 동력어선 30여 척을 이용해 인천 앞바다 등을 휘젓고 다니며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았으나 당시에는 유통체계가 갖춰있지 못해 서울과 인천 등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판매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흥택 형제가 어물 객주를 개설하면서 변화를 맞은 것이다.
이후 인천항 확장을 위해 해안매립 공사가 벌어지면서 어시장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자 해안과 가까운 북성동으로 어시장들이 옮겨가나 생선전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활기를 띄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생선전의 모습은 지금의 생선가게에서와 마찬가지로 손님이 고르면 그 자리에서 비늘을 떼고 머리와 꼬리를 잘라 내장 등을 발라 대팻밥 포장지에 싸서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1905년에는 일본인들이 건너편에 별도의 어시장을 개설해 서로 경쟁하기에 이른다.
1907년에는 현 시장 부근 길가에 노점상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1912년 5월1일 이동판매를 단속하자 상인 등이 시장 땅을 공동으로 빌려 시장의 모습을 갖추었고 1927년 7월에는 시장규칙에 의해 가격통일, 위생시설 등을 실시 및 설치하고 명칭을 부영공설시장으로 변경했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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