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3 00:50:27
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
푸른 눈에 비친 '조선의 얼굴' 제물포
인천은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서울의 관문도시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개항기 때에 인천 중에서도 제물포는 배를 타고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첫인상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대체로 말이나 나귀 또는 가마를 타고 이동했는데, 이 길이 곧 강화로의 철곶포에서 분기하는 제물진로(濟物津路)이다. 우선 `대동지지'에 기록된 철곶포에서 영종포진까지의 제물포길 노선은 다음과 같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철곶포는 현 양화교, 즉 안양천이 한강으로 합수되는 지점 부근으로 추정된다. 고음달내는 현재 `곰달래'로 사용되는데, 양천구 신월7동 동사무소 부근에 곰달래마을이 있고, 서울시 신월동과 부천시 원종동 사이의 시경계 지점, 경인고속도로 바로 남쪽에 곰달래고개가 위치한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8세기 중반에 곰달래마을은 점막(店幕)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현은 한남정맥(漢南正脈) 위에 놓인 고개로 별고개로도 불린다. 현재 별고갯길은 주변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교통로로서의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인천과 서울을 잇는 큰 길이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인천대공원과 부천시 송내역 사이에 있는 비루고개로 나와 있다. 성현은 남동구 만수동 삼보아파트 부근에 있는 마을이름이기도 한데, 이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별고갯길이다. 인천쪽에서 고개를 넘으면 물넘어 마을이 처음 나타난다.
곰달래고개와 별고개 사이에는 굴포천 변의 저평한 평야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평야부에서 길이 나는 양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구간에서도 여러 갈래 길이 많아 어떤 길이 제물포길의 본선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일제시기 지형도에 의거하여 가장 빠른 경로를 살펴보면, 고음월리(신월동)~성곡(부천시 오정구 여월동)~당아리고개~조종리(조마루, 원미1동)~소사역 서쪽 1㎞지점(46번 국도)~송내촌(솔안말~노동부 노동연수원)~구산리~(물넘어)~성현으로 이어진다.
서울쪽에서 성현을 넘으면 길은 만수2동과 만수4동을 지나 문일여고 동측으로 이어지고, 수원지들 능선(구월동 594)을 따라 올라가다가 서낭당 고개를 넘는다. 이후 옛 길은 농수산물 도매시장 안으로 편입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옛 길은 도매시장을 지나서도 인천시 고속터미널 안쪽으로 비스듬히 관통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인명여고 앞 길로 이어진 후 문학경기장을 지나 관교동으로 이어진다. 관교동은 인천의 읍치로서 개항장인 제물포로 행정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인천의 중심지였다.
`대동지지'에는 “양화도에서 기탄교까지 8리, 오리곡까지 7리, 성현까지 30리로, 행인 중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많다(自楊花渡至岐灘橋八里 梧里谷七里 星峴三十里 行人多由此)”고 하였으니, 19세기에 들어 서울~인천 간 경로는 곰달래길보다는 기탄을 경유하는 노선이 더 많이 이용되었던 듯하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기탄은 목감천과 안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표기되어 있으니, 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고척1동에 해당하고, 기탄교는 안양천에 놓인 다리로 지금의 고척교 부근일 것이다. 일제시기 지형도에는 기탄의 위치에 갈탄(葛灘)이 적혀 있는데,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서울시 개봉동에 있는 가린열(갈탄, 광주물) 마을을 `갈탄이 변하여 된 이름인 듯함. 칡넝쿨 모양으로 물이 합수하던 여울 근처의 마을'로 설명하고 있으며, 고척동에 있는 간열다리(萬灘橋)를 `가린열다리(갈탄교)가 잘못 변하여 만탄교가 됨'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기탄교는 곧 갈탄교이고 만탄교인 셈이다. 이 다리는 현재 고척교이므로, 기탄이라는 곳은 고척교 부근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고척동은 원래 부평군 수탄면 소속으로,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기탄장이 개설되던 상업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다. 이후 기탄장은 소멸되었다가 `경기읍지(1871)' 단계에 수탄면장으로 복설되는데, 이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기탄을 경유하는 도로의 이용률이 높아졌음을 시사한다. 양화도에서 기탄에 이르는 길도 여럿 있었는데, 당산2동~버드나룻길~영등포 로터리~경인로(문래1동사무소까지)~(영등포초등학교를 관통하여 경인철도 횡단)~도림2동사무소~(구로역에서 경인철도 다시 횡단)~고척교~기탄(고척1동)을 경유하는 길이 가장 큰 길이었고, 이후 송내까지는 괴안동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민체육공원을 거쳐 소사2동으로 우회하는 노선이 경인로에 해당한다. 이 길은 도로표지판에 `구경인로'라고 표기되어 있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도 경인로는 성현을 넘어 주안을 경유, 제물포로 나 있으니, 1876년 이후 제물포항으로서의 경제기능은 관교동 읍치의 행정기능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동지지'에는 곰달래고개에서 중간 경유지 없이 부평도호부까지 이어지는 제2의 분기로 20리 길이 하나 더 기록되어 있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나 일제시기 지형도에는 곰달래고개를 넘기 전 화곡사거리 부근에서 신월5동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이 분기로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이 일대가 택지로 변했고 격자상의 도로망이 새로 정비되면서 옛 길은 사라졌다. 신월5동 독수리아파트에서 시경계선에 연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오쇠동~대장초등학교(부천시 대장동)~대장교(동부간선수로)를 경유하는 노선이 부평가는 직로로 생각된다. 오쇠동에서 대장교까지는 옛 길의 흔적을 간간이 찾아 볼 수 있지만, 이후의 길은 경지정리 혹은 택지개발로 모두 사라졌다. 대장교에서 서남방향으로 오정동 한다리 마을~굴포천(渡河)~살나리마을(계양구 계산동)~한다리(서부간선수로)~계산천 연로(沿路)~부평도호부(부평초등학교)까지가 본 분기로의 경로였다.
/김종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역사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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