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로 - 역사풍랑 일렁이는 땅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3 00:52:10
강화로 - 역사풍랑 일렁이는 땅
위태로운 국운앞에 죽음으로 항거 수도방위 최후의 보루
▲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염화와 강화도. 강화는 우리나라 5대 도서 중 하나로 본 섬임 강화도와 석모도·교동도 등 10여개의 섬으로 구성되었다. 한강과 임진강·예성강의 하구에 자리한 지리적인 요인으로 예로부터 해운의 길목 및 군사 요충지로 중요시 돼왔다. /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54.강화로>6< - 역사풍랑 일렁이는 땅
#강화행(江華行)
강화로가 확포장되면서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소위 신작로가 그것. 그 자동차길은 새롭게 부상하는 영등포에서 양천을 거쳐 김포읍, 통진을 지나 성동진(城東津)에서 배를 타고 갑곶진에 내려 강화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장 일반적인 강화행의 행로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 한양보다 가까운 개성 등 북쪽에서는 영정포(領井浦)에서 배를 타고 월곶진으로 해서 강화읍으로 들어오는 길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경인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가서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초지진이 있던 초지항에 닿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되었다.
경인선이 부설된 이후 강화도 가는 항로는 이미 일본인들의 삼신(森信)기선회사와 인천(仁川)기선회사가 경쟁하고 있을 정도로 번창 일로였다. 삼신기선회사는 본섬인 강화도 갑곶까지 운행하였지만 인천기선회사는 석모도로 직행하는 노선 등으로 경쟁했다.
여기에 전통적인 목선이 싼 가격으로 이들 경쟁에 가세했다. 신속하고 편리한 증기선이 있었지만 왕복 36원으로 목선 4척을 불러 타고 70리 물길을 노를 저어 가는 수학여행 등은 비용절감을 이유로 자주 이용됐다.
이렇듯 강화행은 근대 이후 수학여행의 단골코스로 떠올랐다. 강화도는 단군의 유적을 비롯하여 병자수호조약 등 근대에 이르기까지 길가의 한줌 흙과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무진장한 역사적 사실과 유적을 지니고 있는 역사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피란길, 인조의 강화행
강화도로 가는 길은 왕족의 유배지 길이기도 했다. 개경이나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화도와 교동도로 유배된 까닭은 그래도 왕족이었던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최씨 무인정권을 이끌었던 최충헌 형제에 의해 명종(明宗)이 폐위되자 태자와 태자비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다시 폐위된 희종(熙宗)도 강화도로 유배되어 영종도를 거쳐 교동도로 옮겨졌다. 또한 창왕(昌王)이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우왕(禑王) 역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옮겨가 죽음을 당했다.
조선시대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광해군(光海君)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그해 3월21일 육로를 통해 강화도로 압송되어 갔다. 왕비와 세자, 세자빈 등과 함께였다.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불행한 광해군과 폐세자의 강화도 압송은 정사공신 2등으로 책록된 판윤 이괄(李适)이 그 악역을 맡았다. 힘든 뱃길을 피해 육로로 가는 정도가 광해군을 위해 할 수 있었던 반정군의 배려였던 셈이다.
그러나 몇 년 뒤 여진족의 침략으로 야기된 정묘호란(1627년) 당시 인조는 광해군이 갔던 그 길을 따라 강화도로 피란길에 올랐다.
1627년(인조 5) 1월 후금의 군사 3만여명이 남하하여 황주(黃州)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1월21일 왕대비와 중전을 먼저 종묘의 신주와 더불어 강화로 거둥케 하였다. 며칠 뒤인 1월26일 새벽 인조의 대가(大駕) 또한 궁궐을 나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을 통해 저녁에 양천(陽川)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이튿날인 27일 이른 아침에 양천을 떠나 김포(金浦)의 원소(園所)를 들러 묘에 배례를 드렸다. 피란의 와중에도 인조는 현재 김포시청 뒤에 있는 장릉(章陵)으로 추존된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였던 것이다. 그 참배의 기분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참배 뒤 오후 김포 신현(新縣)에서 쉬었다가 저녁에 통진(通津)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28일 하루를 쉬었다가 이튿날인 29일 대가는 10여 리를 행차하여 갑곶진(甲串津)에 이르러 장막(帳幕)에 잠깐 머물렀다가 염하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섰다.
#실록봉안의 길, 전등사행
강화는 실록을 봉안 또는 모셔오거나 포쇄하러 가는 관리들이 오갔던 길이다. 동시에 강화유수가 강화로 가는 행차의 깃발이 찬란하였던 길이기도 했다.
1660년(현종 원년) 선조의 외손자로서 강화유수였던 유심(1608~1667)이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왕실세보와 실록을 이관 보관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1678년(숙종 4) 마리산 사고가 이곳 정족산 사고로 옮겨왔다. 1713년(숙종 39) 20살의 청년 왕자였던 연잉군(영조)은 선원록 봉안 도제조가 되어 이곳 강화도 사고를 찾았다. 이때 포쇄와 검열 등을 위해 별관으로 지어진 취향당(翠香堂)의 편액을 쓰고 있다.
추사 김정희도 실록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들고 강화사고에 갔다가 마리산을 올라 시를 짓는다. 5수의 시 가운데 마지막 시구는 실록을 모셔가게 된 감격을 큰 바다보다 더 큰 은혜에 비유하고 있다.
실록은 전등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록을 모셔오거나 포쇄하는 길은 전등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게 강화행은 전등사 혹은 보문사를 가는 길이기도 했다. 석모도 보문사 눈썹바위 아래 돋을새김해 놓은 관음을 찾아가는 길은 그 자리에서 서해를 바라보는 눈맛에 있다. 동해 낙산사에서 보는 일출이 바다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장엄함이라 한다면 이곳 보문사에서 보는 서해 낙조는 바다로 잔잔하게 스며드는 안온함이다.
온수리 전등사는 이웃마을 사기리에 살던 판서를 지냈던 이시원(李是遠) 가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시원은 1841년(헌종 7) 대조루 개건, 1855년(철종 6) 대웅전 중건의 대시주였고, 시왕전 등의 전각 중수에 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 등이 시주함과 동시에 이건승(李建昇)은 중수기를 썼을 정도이다.
#의로운 죽음의 길
사기리의 그들은 하우고개 중턱에 위치한 하일리의 정제두 선생과 연결된다. 강화학파로 일컫는 그들의 견결한 삶과 높은 기상을 따라 숱한 지식인들도 강화도로 가는 길을 택했다. 강위(姜瑋, 1820~1884)와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등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뜨거운 삶을 살았던 그들이다.
1866년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당시 포격에 놀란 관군이 강화성을 버리고 도망쳐 강화성이 함락되자 사기리에 살던 78살의 이시원은 동생 이지원과 더불어 음독 자결을 하였다. 15살의 이건창은 할아버지의 그 뜨거운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시원 형제의 자결 소식은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동력이 되었고 강화도의 의로운 죽음을 잇는 역사적 계보를 담았다.
이미 병자호란 당시 윤증의 어머니이자 윤선거의 부인이었던 공주 이씨가 1636년 1월23일 자결한 땅이기도 하다. 1636년 12월12일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다는 소식에 12월14일 공주 이씨는 차가운 눈보라 속을 뚫고 세 명의 자식의 손을 꼭 부여잡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1637년 1월22일 새벽을 기해 염하를 건너는 작전을 개시하여 강화도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된다. 그리고 이때 김상용(金尙容), 홍명형(洪命亨), 이시직(李時稷) 등이 화약을 터뜨려 스스로 불타 죽었던 땅이다.
국가 혹은 수도의 방비에 있어서 빼놓아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땅이 강화도였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화도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강화도로 가는 강화로는 군마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전통시대 강화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근대로 들어와 전쟁 방식은 군함에서 함포를 쏘아대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약삭빠른 일본은 운요호를 몰고와 강화도를 공격했으면서도 오히려 운요호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배 8척을 몰고 와 배상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이나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상대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구실로 늘 써먹었던 방식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로 강화 염창을 수비하였고, 1874년 진무사가 되어 강화 연안에 포대를 구축하였던 용맹한 장수였던 신헌(申櫶, 1810~1888)은 1876년 일본의 전권변리대신 구로다를 만나러 강화도로 향했다. 그렇게 하여 병자수호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이 불평등하게 체결되었고, 근대는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채 불평등하고 억울하게 강화도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동민 수원시 문화관광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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