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인천 풍물기행 ④ 경제화와 고무신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7-03-17 16:41:27
김윤식의 인천 풍물기행 ④ 경제화와 고무신
지금은 우리 생활에서 멀어져 간 고무신에 대해 대부분 한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李夏榮)이 1919년 서울에 설립했다는 대륙고무를 최초의 메이커로 기록한다. 물론 이하영의 첫 제품은 순종(純宗) 임금이 신었다는데, 그것은 1922년의 일이다. 그밖에도 1921년 김성수(金性洙)의 중앙상공주식회사, 고중희(高重熙)의 반도고무공업소, 1922년 이후 김연수(金秊洙)가 만들었다는 별표 고무신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한국형 고무신을 창조해 낸 원조는 분명 우리 인천일 것이다. 그리고 고무신이 탄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견본 구실을 했던 것 역시 인천에서 발명된 경제화(經濟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우리나라에 가죽 구두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천 경동에도 삼성태(三盛泰)라는 양화점이 문을 연다. 그러나 당시 구두는 한 켤레 값이 무려 쌀 두세 가마와 맞먹는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여기서 삼성태의 주인 이성원(李盛園)이 착안한 것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값싸고 질 좋은 짚신 대용 신발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닥은 가죽, 등 쪽은 우단이나 천막 천을 댄 오늘날의 남자 고무신 형태의 경제화였다. 한복 버선발에도 잘 어울리고 신고 벗는 데도 아주 편리한, 이름 그대로 매우 실용적인 신이었다.
한편, 1918년 인천에 정착해 용동에서 식료품점을 하던 안기영(安基榮)은 일본 고베(神戶)에서 판촉차 한국에 온 고무신 업자를 만나 그한테 호모화(護模靴)라는 구두 모양의 일본 고무신을 보게 된다. 서울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안기영의 머리 속에는 언뜻 스치는 게 있었다. 안기영은 그 일본인에게 마른신과 삼성태의 경제화 모양대로 두 가지의 고무신을 만들 것을 주문한다. 얼마 후 고베에서 마른신 모양의 여자 신발과 경제화 모양의 남자 신발이 도착했다. 경향 각지에서 참으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성원의 슬기로움과 안기영의 선구적 착상이 어우러져 최초의 값싼 한국형 고무신이 인천 땅에 탄생한 것이다.
이하영의 대륙고무는 이런 내막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설립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천 율목동에 상당한 땅과 별장을 소유했던 권신이었으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안기영의 고무신은 인천 기업으로서 오래 남지 못한다.
1세기 전, 외래 문물의 도입과 그것을 우리에게 맞게 재창조한 인천과 인천인들의 이러한 능동적이고도 선구적인 노릇이 흔한 인터넷 지식 사이트에조차 한 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 eo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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