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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조기와 꽃게... 김윤식/시인

by 형과니 2023. 3. 29.

조기와 꽃게... 김윤식/시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3 09:38:16

 

조기와 꽃게... 김윤식/시인

II쌍고동 울었던 그때그시절II

 

찬밥에 물 말아 굴비 머리까지 `쪽쪽' 게 뚜껑에 밥 비벼 한공기 `뚝딱'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최고 진미의 대중적 해물로는 대략 이 4월부터 5월까지 성시를 이루던 참조기와 꽃게를 꼽을 것이다.

하인천 부두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참조기와 백옥같이 희고 풍성한 단맛을 가진 꽃게의 살!

황해 물에서 나는 그 밖의 다른 좋은 생선이 왜 또 없을까만 이것들은 바로 이맘때쯤 우리 한국인의 구미를 사로잡는

대표적인 어물이면서 세계 최고라 해도 좋을 가미(佳味)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마 인천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런 호들갑에도 전혀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양자강, 황하 그리고 우리나라 여러 큰 강에서 흘러내리는 먹이로 살찌는 조기는 서해의 주인공이다.

칠산(七山) 앞바다로부터 연평도까지 산란하기 위해 이동하는 조기 떼를 달 반을 두고 잡아낸다.

산뜻한 단맛을 풍기는 조깃국은 일품이고, 굴비가 없이는 여름 살림을 못하는 줄 알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

꾸들꾸들하게 반쯤 마른 알배기 굴비를 구운 것은 잊기 어려운 한국의 특미다.”

 

 꽃게는 인천 앞바다에서 나는 것이 최고다. 그저 쪄 먹어도, 지져 먹어도 살이 달고 씹는 맛이 희한하다.

묵은 간장으로 게장을 담그면 참게 장만은 못해도 노란 황금색 장맛이 고소하면서 시원하여 술안주로도 좋고 밥반찬으로도 그만이다.

쪄낸 게살을 모아 양념한 쇠고기와 함께 전유어처럼 지지면 보기에도 호화스럽고 맛도 굉장하다.”

 

 인용한 두 글은 모두 작고하신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 쓰신 것으로 인천의 조기와 꽃게에 대해 상찬(賞讚)하는 내용들이다.

워낙 미각이 깊으셨던 데다가 문장 또한 침이 고이도록 지극히 맛깔스럽게 쓰신 까닭에 더 이상 첨언, 부언이 필요 없을 성싶다.

있다면 이런 맛을 이제는 이렇게 책갈피 속에서나 읽고 느껴야 한다는 탄식뿐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크고 실하지는 못해도 꽃게 하나는 신 박사께서 품평한 대로

그럭저럭 그때의 맛을 볼 수 있는데 조기는 영 끝장이 나고 말았다.

어장의 환경 변화와 무분별한 남획이 그만 씨를 말렸기 때문이다.

연평도 파시(波市)라는 말은 이제 사어(死語)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아무 길바닥에서나 조기를 말리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중구 대부분 동네 골목길은 조기를 말리느라고 펴놓은 가마니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여기저기 발길에 채일 정도였는데 웬만한 집조차도 보통 5백 마리, 한 동쯤은 사서 널었다.

이라는 말은 조기 천 마리, 비웃 2천 마리 하는 식으로 수를 세는 단위인데

당시 우리 인천에서는 대체로 조기 5백 마리를 한 동으로 계산했던 것 같다.

이렇게 조기가 흔했던 탓에 당시 인천 사람들은 영광 굴비를 그다지 선망하지 않았던 듯하다.

 

 조기는 몸 크기가 대략 40센티는 되는데 그런 놈들은 비늘도 엄지 손톱만큼씩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잿빛을 띤 은색 광택이 있고 배 쪽은 붉거나 황금색인데 수백 마리가 시뻘건 알집을 밑으로

 

삐죽이 내밀고 누워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요즈음 백반 집 밥상에 올려지는 손가락보다 조금 큰 종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가끔 내동이나 송학동 쪽 골목길에서 조기 서리를 했다.

지나가다가 슬며시 한두 마리를 집어 가방에 넣거나 동복 윗도리 가슴속에 품고 줄달음을 쳤다.

가방과 몸뚱이에 조기 비린내가 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기막힌 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서리한 반쯤 마른 굴비는 학교 뒤 숲에 들어가서 원시인처럼 그냥 날로 찢어 입에 넣기도 했고,

어느 때는 친구네 셋방 연탄 화덕에 올려 인근에까지 참으로 화려한 냄새를 풍겨 주기도 했다.

 

 굴비는 좀 청승스럽지만 그때의 방식으로 먹어야 더 맛이 있는 것 같다.

전기 밥통이 없던 시절이니 밥은 당연히 찬밥이고 거기에 먹다 남은 굴비 토막을 뒤적여 대가리와 가시까지 쪽쪽 빨아먹는 맛어다

.어느 날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는데 마침 집은 비어 있고 찬장에는 찬밥 한 덩이와 아침에 먹다 남긴 구운 굴비 쪽이 있다.

가방만 마루에 던져 놓고는 모자 벗을 겨를도 없이 그냥 선 채로 밥을 물에 말아 뚝뚝 꺼 먹는 것이다.

더운밥에 금방 구운 굴비 쪽을 올려놓고 먹어야 정식이겠지만

이렇게 머슴 밥 먹듯 다소 처량하게 먹는 굴비 맛도 여간만 좋은 것이 아니다.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도 워낙 맛을 파는 성격이어서 지청구를 많이 들었다.

그것이 생전에 늘 안쓰러우셨는지 후일 성년이 되어서도 어머니께서는 젯상에 올랐던 굴비만은 당신 남편보다도,

또 형이나 다른 형제들보다도 둘째인 내게 무조건하고 우선권을 주시거나 가장 맛있는 알짜 부분만을 독식케 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집 굴비는 작은형 굴비라는 아우들의 볼멘 소리를 다 들었었다.

 

 꽃게 맛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인천항에는 덕적, 연평 해역에서 잡히는 것과 나머지 상당량이 중국으로부터 조달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60년대에 이르기까지 먼어금(송도)의 능허대 한진 나루 앞이나 동막,

척전에서 소를 타고 나가 그물을 쳐서 잡던 꽃게가 크기에서나 맛에서나 으뜸이었다.

사진 작가 김용수 선생이 남긴 먼어금 사진을 보면 그 시절 조개잡이 아낙들의 긴 행렬과 함께 황소를 탄 어부들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다 자란 꽃게 암컷을 몇 마리고 삶아서 식구들이 죽 둘러앉아서 딱지를 열어 주황색으로 익은 고소한 알과

집게 다리에 딸려 묻어 나오는 흰 살을 발라먹는 뿌듯한 맛이란 그야말로 호사 중의 호사였다.

아마 호사를 이른다면 이야말로 서해 바다 인천 땅에 난 천생의 호사가 아니었는지.

 

 게는 체면불고하고 손이고 볼이고 온통 비린내 범벅을 하며 뜯어내고 쑤시고 빨고 불고 하면서 게걸스럽게 먹어야 제 맛이다.

먹는 동안은 누가 말시키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큰 놈 한 마리에서 한 마리 반만 말없이 작살을 내어 구복(口腹)을 채우고 나면

머리가 다 띵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미와 함께 포만감이 찾아오는 것이다.

 

 조선 간장을 몇 차례 고쳐 다려 부으며 담근 게장은 세계 유일, 최고의 장맛일 것이다.

진한 간장 맛과 함께 어우러져 발효한 게장의 향취는 정말이지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형언하기가 어렵다.

피로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가도 게장이 앞에 놓이면 어느덧 숟가락에 손이 가게 되고 이내 밥 한 그릇을 거뜬히 해 치우게 되는 것이다.

 

 게장은 큰 등딱지 하나만 가지고서도 아홉 식구 세 끼 반찬으로 넉넉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짜게 담가 야 한다.

살이 연해 간기가 적으면 쉬 곯아 버리므로 짜게 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짠맛이 침샘을 자극해서 장맛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튼 딱지 양옆 뾰족하게 돌출한 부위에 박힌 알까지 젓가락으로 파내어 가운데로 모은 후

거기에 밥을 넣어 비벼 먹는 황홀한 맛은 한국인으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요즈음은 게 또한 전과 같지 않아서 납덩이가 들어 있는 중국산이 횡행할 뿐 아니라 크기나 품위가 훨씬 떨어지는 물건만 돌아다닌다.

옛날 그 풍성했던 인천 앞바다 산()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조차도 볼 수가 없다.

 

 조기 꽃게 말고 4, 5월에는 밴댕이가 맛을 낸다.

그 시절 인민군 집이라고 불리던 하인천 쪽에 오래된 밴댕이 집이 남아 있는데

여전히 뼈 채 썰어 내는 회가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느끼게 한다.

 

 5월에 호식할 수 있는 것이 대하다.

이것 역시 송도 앞바다 사리에 걸리는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프라이를 해 먹거나 저냐를 해도 좋고 양념 구이를 해도 일미였다.

 

 내동 중소기업은행 맞은편 터진개 길 모서리에 지금은 무슨 컴퓨터 가게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거기가

70년대 임박할 무렵까지 중국인 만두 가게였다.

우리들이 만두를 먹으러 가면 주인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까닭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대하 때문이었다.

간혹 우리들 같은 학생들이 드나들고 나면 몇 마리의 대하가 축났던 경험을 중국인은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 살림은 대하를 그토록 많이 사 둘 돈도 이유도 없는데 산해진미에 정통한

중국인들은 대나무로 짠 가고하나가 그득하도록 그것을 사 놓았던 것이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추억담을 적어 가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60년대의 아직 매립이 안 된 먼어금 지대나 월미도, 괭이부리 인근이 떠오른다.

매립해서 만든 무슨 신도시가 자손 만대 득이 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매립을 하지 않고

그냥 꽃게며 대하, 동죽을 잡을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면 분명 득이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벌써 우리 2세들만 해도 우리가 먹었던 그것들을 영영 먹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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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기자>mungk303@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