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신포동의 세모(歲暮)

by 형과니 2023. 3. 26.

신포동의 세모(歲暮)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7-03-07 15:59:41

 

신포동의 세모(歲暮)

 

쌍고동 울었던 그때 그시절

가난한 술잔 기울이며 덕담 건네던

신포동의 세모(歲暮)

 

  김윤식/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서서라는 시가 생각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이 이 한 해의 가장 어둡고 추운,

그리고 가장 깊고 그윽한 마지막 밤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내가 눈발을 맞으며 숲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나를 데려다 주는 작은 말이 방울 소리를 울리는 것도 아니지만,

1966년 대학 1학년, 남 앞에 시 나부랭이라도 외운다는 자랑이 승해 서툰 영어로 기를 쓰고

외우던 이 시가 왜 찬바람 불고 눈발 날리는 오늘 이토록 못 견디게

내 가슴 한 구석에 다시 살아나는지…….

지금 나는 그 시를 생각하며 조금은 눈시울이 젖어 들고,

목 울대 밑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그런 감정에 빠진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무엇이든지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시절의 세모(歲暮)를 생각하면 그냥 슬프고 아름답다.

 

지금은 추억 속에 가물가물 사라진 신포동 시장 안의

백항아리. 막소주와 약주와 새우젓과 허름한 감자국을 팔던,

인천 최고의 명소였던 선술집. 바닥에 묻혀 있던 항아리는 어디로 갔을까.

거기 가득했던 약주는 누가 다 마셨을까.

우리 같은 젊은 또래들은 절대 입장 금지를 고수하던 이 집 영감님도 할매도

말년에 가게를 맡았던 딸도 벌써 다 떠나 버리고 없다.

 

 이맘때쯤 우리는 시인 최병구 선생을 따라 백항아리집 카바이트 불빛 아래서 바로 카바이트 약주를 마셨다.

이것이 한 해를 보내는 의식 절차요, 그래서 꼭 나누어 먹어야 하는 음식이기나 한 듯,

그러나 다음날이면 영락없이 뱃속이 부글부글 끓고 심하게 설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약주를 마시며 행복해 했다.

절고 절어 노랗게 색이 바랜 새우젓을 안주 삼아 못 사는 것이 다 우리 죄라고 생각하며 그 짜디 짠 술을 마셨다.

 

 작은 체구에 눌러 쓴 도리우찌, 검은색 바바리 코트, 그리고 푸른 연기를 뽑아 올리던 반들거리는 파이프.

이 돈 없는 시인의 가느다란 눈웃음을 보며 훗날 우리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늙자, 저런 시인이 되자,

그런 생각을 하며 속절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신포동 시장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최 시인은 혼자 비틀거리며 우리를 떠났다.

 

 만년 무욕(無慾)의 시인 손설향 씨도 있었다.

저녁마다 그가 와서 말 없이 앉던 미미집 구석 자리의 촉수 낮은 백열등도 이미 꺼지고 말았다.

두드려 구운 북어 한 마리와 약주 한 병. 이 과분하기만 한 성찬이 하늘이 그에게 내리신 평생의 몫이었는지 모른다.

손설향 시인과 더불어 내게는 세밑과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외상 술값을 유예해 주었던

고마운 주인 보니파시오와 그의 부인은 지금 어디서 살까.

그 집에서 먼저 일하던 너그러운 아주머니. 웃으면 입 속의 금니가 환히 보이던 그 복 받을 아주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요즘 시장 전체를 새로 단장한다고 이 터진개 골목길들을 모조리 뜯어 놓았지만

화가 우문국 선생과 다니던 첫 번째 골목, 옛날 생선전 자리도 문득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 뻘건 알이 비어져 나온 채 좌판에 누워 있던 내 몸뚱이만한 민어며,

그 암놈을 말려서 만든다는 암치 이야기며, 또 술안주에 그만인 어란(魚卵) 이야기며…….

그렇게 다음 골목으로 내려서면 길바닥에 죽 늘어앉아서 대합, 동죽, 맛살 따위의 조개들을 까던 아낙들.

그 아낙들을 짓궂게 놀리던 최병구 시인. 그의 모습이 시장 입구에만 나타나도

아낙네들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뒤돌아 앉았던 요절복통할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가는 세월과 함께 하나같이 떠나고 없다.

 

 신포동 시장 안은 모든 것이 다 내 것처럼 풍성해서 실제 아무것 가진 것 없이 한 해가 가도 그냥 배가 부르고 좋았다.

잿물을 넣어 반죽한다던 신신옥 튀김 우동. 흐린 불빛 아래 고작 그 못된 우동 한 그릇을 놓은

적막한 송년회의 저녁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더 오롯하기만 했던 그 시절.

다시 삐걱거리는 은성다방의 나무 계단을 오르는 것이 또 그토록 정겹고 뿌듯하던 그 해의 세모. 죽은 화가 김영일 형, 시 쓰던 이석인, 이효윤 형의 얼굴도 떠오른다.

이 세모에는 그들이 없다. 신포주점에 그들의 말소리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느 해였던가. 먼저 떠난 친구 하나가 복은 겨울이 제 맛이라며

난생 처음 그 고급 복요리 집 천미(千味)에 데려갔던 추억도 생생하다.

취직 걱정도 해 주고 올해보다 내년에는 더 건강하고 돈도 많이 벌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나누던 그 해 겨울.

오늘은 친구도 없고 복집도 없고, 마음 속으로 눈물처럼 밍밍하면서도 찝찔한 그 지리 국물을 마신다.

 

 그 옆에 옆에쯤이었던가. 미락(味樂)도 있었고 신외과(愼外科) 건너편에 경양식집 비슷한 빳시라는 집도 있었다.

60년대 초였을 것이다. 빳시에서 토스트를 처음 먹어 보던 그 황홀했던 기억! 목구멍이 뽀얗게 느껴지던 버터의 맛도,

참으로 달짝지근한 딸기잼 맛도 좋았지만 그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화려한 분위기에 나는 더 황홀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게 거기였는지 그 옆이었는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처음 먹어 본 오므라이스의 맛은 더욱 기가 막혔다.

얇게 프라이한 달걀 포장과 그 위에 피카소가 휘갈겨 놓은 듯한 붉은 토마토 케첩의 곡선들,

그리고 흰 접시를 달그락거리면서 시큼하면서도 고소하게 볶아진 밥을 떠 입에 넣는 맛은 정말 잊을 수 없었다.

 

 다시 자선소아과를 지나 옛 답동관 골목 앞에 이른다.

유 씨 영감님이 인천에 몇 안 되는 유명한 해장국집을 여기에 열었는데, 이 집 또한 오래 전에 이 신포동을 버리고 말았다.

하루 종일 빈속으로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슬며시 불러 들여

아버지 모르게 국밥을 말아 주던 나와 동갑내기였던 이 집 큰딸.

키는 작았지만 눈자위만은 서늘할 만큼 크고 맑았던 그녀는 그렇게 주위에 보시를 많이 했다.

 

 문을 닫는 횟수가 조금 늘기는 했어도 아직 건재한 다복집, 그 건너 빈대떡을 굽는 대전집.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희고 둥글고 후덕하게 생긴 딸이 맡아 하는 마냥집,

어떻게 그 이름을 기억해 달았는지 이름만 들어도 옛날 생각이 떠오르는 염염집.

이 대낮에 남의 집 간판을 찾아다니며 저 혼자서 뭉클거리기도 하고 저 혼자서 웃기도 한다.

 

 옛날 화신면옥 건물과 한양숯불갈비 사이의 한 사람이나 지날까 말까

한 좁은 골목을 나가면 외설스런 종이를 불빛에 비추던 국제다방이 있다.

불빛에 비치면 몇 개의 선이 겹쳐 남녀의 얽힌 모습을 표현하던 종이장을 구석 자리에서 보기도 했다.

없어진 금화식당에서 글 쓰는 사람 몇, 그림 그리는 사람 몇, 그리고 서울의 모 신문사에 다니던 어떤 분,

이렇게 송년회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다방에 들러서 벌인 웃음거리 일.

그게 19781227일이라고 내 일기장에 적혀 있다.

 

 공사가 끝나면 이 터진개 시장이 어떻게 변해 버릴지 모른다.

사람도 세상도 변하는 것이 이치이니 변할 만큼 변할 것이다.

 

 나는 지금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서 있다.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는 신포동 어귀 차가운 저녁에 혼자 서 있다.

아무도 없다. 춥다. 정말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는 것인지 모른다.

그게 인생인지 모른다. 한 해는 또 그렇게 간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