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한미 야구시합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09 08:27:14
광복과 한미 야구시합
“5년 만에 보는 야구전이라 관중이거나 필자이거나 서투르기 짝이 없다. 여기에 평다운 평이 될 것인가?” 인천에서 발행되던 『대중일보』1945년 11월 6일자 스포츠 기사의 한 구절이다. 전전날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천 주둔 미군 환영 친선 야구전 관전평의 서두인데 필자가 적잖이 흥분한 느낌이다. 5년 만이라고 한 것은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직전 무렵부터 모든 운동 시합이 중단되었던 시기를 뜻한다.
인천체육협회(회장 申太泳)가 주최한 이 한미 친선 야구전은 광복과 함께 진주한 미군에 대한 환영의 의미였다. 인천 주둔군 총사령관 칩스 소장의 유쾌한 웃음과 박수 소리, 파이프 담배를 문 채 양군의 열전을 흥미롭게 관전하고 있는 인천 군정관 스틸맨 중좌, 그리고 이 야구전을 통해 “36년 동안 걸어보지 못했던 태극기와, 성조기가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큰 감격과 감명을 느꼈을 시민들.
시합은 9대 2. 평자의 말대로 실책이 적었던 인천 선발의 일방적인 대승이었다. 앞서 경성(京城)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환영 시합에서 전부 패전을 기록했음에도 인천군을 얕보았던 나머지 미군은 다시 한 번 큰 패배를 안았다. 1920년대 초부터 이미 한용단(漢勇團) 야구단을 통해 일본 팀들을 모조리 격파하던 전통과 저력의 인천 야구를 이 미군 팀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인천군의 투수 유완식(劉完植)은 일본 프로 한큐(阪急) 팀의 명투수였고 포수 윤복만(尹福萬)은 도문철도(圖們鐵道) 팀의 주전이었다. 인상(仁商) 시절 일본 갑자원대회에 출전했던 좌익수 장영식(張榮植), 그밖에 한용단 이후 고려단(高麗團)으로 이어져 오던 인천 야구팀의 선수들로 1루수 유인식(劉仁植), 2루수 홍병창(洪丙昌), 3루수 박근식(朴根植), 중견수 이연구(李淵龜), 우익수 심연택(沈連澤) 등이 있었으니, 비록 5년 세월의 공백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운(戰雲) 속을 헤매고 다니던 미군을 이기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합을 계기로 인천 야구는 다시 기지개를 켜게 되고 1947년 4도시야구대회,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전국체전을 모조리 휩쓴다. 그리고 그 관록이 후일 인고, 동산의 청룡기 연패 등으로 이어져 구도(球都) 인천의 무수한 우승 신화를 낳게 한다.
광복의 달 25일에 막을 올릴 제2회 미추홀기 전국 고교 야구대회를 앞두고, 문득 1945년의 한미 친선 야구대회 낡은 기사를 통해 광복 59주년의 의미와 더불어 인천 야구 80여 년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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