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짐다방*별다방 시절의 팝 (POP)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9 19:33:32
은성*짐다방*별다방 시절의 팝 (POP)
흐르는 팝 선율에 가슴속 갈증 식혀
화선장 위의 은성다방*기업은행 앞의 짐다방과 조금 뒤에 생긴 동인천 대한 서림 자리의 별다방이 있었다.
김윤식의 쌍고동 울었던 그때 그시절
그 시절의 봄
봄은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늘 똑같은 훈풍과 향기 가득한 꽃가루와 촉촉한 비를 뿌리며 우리에게 오지만 그것을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같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1960년, 4·19와 더불어 중학생이 된 그 해 봄은 특히 설렘 그것이었다.
어려운 입학 시험에 급제를 하여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 뿐만 아니라 몸 저 밑바닥 어느 구석에서 아련하게 무슨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 오른 수목 사이로 보이는 백악(白堊)의 기상대 건물이 꿈만 같았고 앉아 내다보는 창 밖의 풍경이 그렇게 망연하면서도 어지러울 수가 없었다. 학교 뒷산의 벚꽃 잎새들이 귓속에서 수천 개의 이상한 울림을 만들어 놓거나 가슴에는 쿵쾅쿵쾅 동계(動悸)가 두근거렸다. 학과 공부는 점점 멀어져갈 뿐. 나나 내 또래들이나 첫 인생의 봄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중학생인 우리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고 할까, 아니면 들쑤셔 놓았다고 할까.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서양 노래였다. 패티 페이지나 브렌다 리, 브라더즈 포, 짐 리브스 같은 가수들은 정말이지 꿈이며 우상이었다. 특히 패티 페이지가 부른 ‘체인징 파트너즈’는 그 애상적이고도 감미로운 선율 때문에 며칠을 걸려서라도 가사와 곡을 꼭 외워 두지 않으면
안 되는 ‘명곡’이었다. ‘그린 휠드’라든가 ‘세븐 데포딜’ 같은 곡들 또한 달콤한 기타 소리와 함께 네 남자가 내는 부드러운 화음이 우리를 감동시킨 좋은 노래였다. 짐 리브스의 ‘히 윌 해브 투 고우’는 또 어땠을까.
그렇게 새로 들어 본 미국 노래들이 우리의 가슴을 갈증나게 했지만 그 갈증을 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는 이른바 유성기를 가진 집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성기(留聲機)! 라디오조차도 보기 드물었으니 유성기는 더더욱 그랬다. 그 유성기, 축음기가 있는 유일한 친구인 김(金) 군의 집에 우리 너덧은 노트 장에 한글로 쓴 영어 가사를 들고 일요일마다 모여들었다. 배다리에서 크게 무쇠 솥 장사를 하던 집이었다. 그 크고 반들반들한 미제 유성기는 친구네 대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친구 부친의 기색을 살피거나 형님의 허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거기에 판을 걸고는 했다.
트위스트라는 것이 유행한 때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62년으로 기억한다. 송도 유원지가 아직 오늘과 같은 모양을 갖추기 전이었는데 봄에 동급생 몇과 그리로 원족을 나가 이 희한한 춤을 처음 목격했다. 아주 경쾌하고 매혹적인 노래에 맞춰 추는 춤이었다. 자세는 엉덩이를 조금 엉거주춤하듯 뺀 채로 서서, 한 쪽 발 발뒤꿈치와 다른 발 발가락 끝으로 땅을 문지르거나 가끔씩 교대로 공중으로 들어올려 비비트는 그런 동작이었다. 물론 두 손은 땅 바닥을 향해 좍 펴고 살랑살랑 젓는 것이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미군이 휴대한 포터블 전축에서 흘러나오던 그 매혹적인 노래는 ‘네버 온 선데이’라는 노래였다. 그 봄 이후 온나라가 이 노래와 트위스트의 열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쯤에는 시내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나팔바지’라는 것을 입은 것 같다. 넓적다리까지는 꽉 끼다가 무릎 근처에서 크게 통이 넓어지는 그런 바지였다. 훈육 주임 선생과 이 바지를 입은 학생들과의 신경전은 새삼 언급이 필요 없을 듯싶다.
맘보 바지는 오히려 그보다 뒤져서 60년대 초를 지나 유행했다. 나팔바지와 달리 하반신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홀태바지였다. 이 바지는 정면으로 설 경우 남성의 윤곽이 너무 선명히 드러나 보여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봄이 시작 되는 이맘때쯤, 새 교복을 맞추면서 옷가게 재단사에게 미리 주문을 하는데 이 바지에 대해서는 선생님보다도 먼저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더 심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용하게 고등학교 졸업 앨범 속의 그룹 사진에는 7명의 청소년 모두가 모조리 홀태바지 차림이 아닌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봄은 참으로 슬픈 기억이 남아 있다. 날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지나 제법 봄이 짙어져야 하겠지만 학교 뒷산, 기상대 인근에 벚꽃이 활짝 피고 나면 그 벚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수천의 꽃잎과 아침 햇살과 한 많은 삶을 밧줄에 걸어 버린 사내의 모습. 참으로 목구멍이 마를 만큼 충격적이고 슬픈 장면이었다.
하지만 봄이 만개하게 되면 자유공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추억을 가지게도 했던 곳으로도 기억된다. 물론 그 행복한 추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야심한 밤에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가는 당장 정학이라는 엄포가 진작에 학교측으로부터 우리에게 하달된 바 있어서 우리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벚나무와 아카시아가 총림(叢林)을 이룬 그 밑 풀밭에는 여자가 착용하는 속옷 나부랭이가 버려져 있어서 다음날 아침이면 몇 개씩 발견되곤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빽바지’라는 미 해군의 개인 소지품을 넣어 운반하는 자루 같은 더플 백을 뜯어 그 조각으로 만든 오늘날 청바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 우리들이 몹시도 선망하던 바지였다. 봄 새학기가 시작되거나 새로 입학하는, 좀 어수선할 때 집에서 돈을 슬쩍 더 타 내서 중앙시장에서 맞추는 것이다. 윗도리는 하는 수 없이 교복이지만 밑은 이 빽바지 차림으로 어쩌다 도넛 가게라도 가는 날이면 여학생들 앞에서 그토록 자랑스럽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학생들이 입는 그 고가의 청바지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고 또 말도 서지 않는 구석기 시대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무렵쯤 크리프 리차드에 뒤이어 영국의 비틀즈가 ‘아이 워나 홀드 유어 핸드’라는 노래로 비틀비틀, 그러나 대단한 열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의 봄은 아주 달랐다. 술을 마실 수가 있고 어른 앞만 아니면 담배를 피울 수 있고 다방이나 당구장에 출입을 할 수가 있었다. 배다리 쪽 사보이 당구장에서 ‘이찌와리’니 ‘히끼’, ‘오시’ 따위의 일본 용어를 늘어놓으며 당구를 배우던 기억이 우습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이 젊은 몸뚱이에 목마름만 키우고, 그래서 이따금 며칠 보지도 않은 새 교과서나 손목시계를 볼모로 잡히곤 했다.
뭐니뭐니 해도 다방 출입처럼 빈번했을까. 예술 하시는 선배들이나 신문사에 계시는 어른들을 따라서는 주로 화선장 위의 은성다방을 드나들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올라 기름 먹인 나무 널이 깔린
이 다방에서는 봄가을로 시화전, 그림전이 열리기도 했다. 젊은 우리들이 가는 다방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으로는 기업은행 앞의 짐다방과 조금 뒤에 생긴 동인천 대한 서림 자리의 별다방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다방의 메뉴가 특이했다. 커피나 홍차는 지금과 같이 기본으로 있었지만 난데없는 ‘깡티’니 ‘위티’니 하는 이상한 종류가 있었다. 위티는 홍차에 위스키를 한 잔 곁들이는 것이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깡티는 위스키와 냉수를 드는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위스키는 주로 당시 생산되던 국산 도라지 위스키를 사용했다. 다방 출입은 해야 하지만 아직도 배고픈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어느 다방에서나 달걀을 팔았다. 달걀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충분히 삶은 완숙과 반만 삶아 흰자위는 익고 노른자는 날것 그대로 있는 반숙이란 것이 있었다. 밥값과 다방 찻값의 이중 부담이 힘겨운 우리들은 이것을 많이 시켰는데 완숙을 먹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는 풍설 때문에 반숙을 주문하곤 했다. 사실 완숙은 달걀 한 개가 통째로 나오지만 반숙은 주방 여자가 너덜너덜하는 흰자위를 보기 좋게 손질하면서 상당 부분을 잘라내기 때문에 그만큼 양이 적어지는 것이다.
올해도 또 봄이 오고 있는데 이제 이런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의 봄이 더 화려하고 더 문명한 봄인지 모르지만 치기가 묻어 있고 슬픔이 묻어 있고 궁끼가 묻어 있던 그때의 봄도 내게는 소중하게 느껴진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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