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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용동권번

by 형과니 2023. 3. 18.

용동권번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7-02-13 00:53:49


 

                    용동권번

경동 신신예식장 앞 공터에서 싸리재 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용동으로 내려서는 골목 계단길이 나온다.
 
이 계단은 완만하고 긴 계단참을 두고 삼 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돌계단에 뜻밖에도 그 옛날 ‘용동 시절’을 말해 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삼 단 중 맨 위 계단,
위에서 세 번째 계단석에 ‘龍洞券番, 昭和 四年 六月 修築’,
 
그리고 중간 계단 맨 윗돌에
‘龍洞券番’이라고 가로로 음각된 글자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용동은 여전히 인천의 밤의 중심지로
호시절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런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용동 163번지.
 
그 옛날 인천의 한량들이 밤마다 부나비처럼 날아들던 골목길.
 
권번이 개설되고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제법 골목이 번창해지고 계단도 보수가 필요했던지
소화 4년(1929) 6월의 수축 사실을 계단석 한 면에다 새긴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관기(官妓)가 있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은 특히 유곽(遊廓)이나 이런 권번 따위를
도시 한복판에 설치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개의치 않았던 것이
이 표지석으로도 증명된다.
 
 아니,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으레 먼저 문을 여는 곳이 이런 업소인 것은
천하가 공인(?)하는 일.
 
그러니 마치 무슨 ‘새마을 사업’이라도 끝낸 듯 떳떳하게
 ‘용동권번’이라는 이름을 조각했을 것이다.
 

권번이란 것은 일제 때 기생 조합을 이르던 것으로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기생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관리하면서
화대(花代)를 받아 주는 따위의 매니저 구실을 하는 기구였다.
 
서울의 한성, 평양의 대동, 그리고 남도의 한남권번 등이 있었는데
 
용동권번은 1910년 전후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용동권번은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고 고일 선생은 적고 있다.
 
또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
권번에서는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 명단을
요릿집에 보내게 되어 있어
 
단골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청할 수 있었고,
 꼭 부르고 싶은 기생은 미리 지휘를 주었다.
요즘 말로 예약이다.”라는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한 세기 가까운 ‘龍洞券番’의 설립 역사는
진작에 어두운 과거와 함께 묻혀졌는데,
 
그 계단석만은 아직도 남아
일제의 낯 뜨거운 풍속을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계단석을 지금 당장 뽑아 없애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