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갈과 인천 사람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0 09:18:24
풍물기행- 배갈
김윤식 풍물기행
배갈과 인천 사람들
인천 최초의 일이 곧 대한민국 최초라는 말들을 한다.
개항 이후 열강의 문물, 제도 대부분이 인천항을 통해 처음 수입되고,
또 최초로 인천에 자리를 잡거나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예가 미국과 구미국 최초로 맺은 외교 조약,
아펜젤러에 의한 감리교 전래, 서구식 공원, 철도 부설, 등대 설치, 기상 관측 개시 등등이 있는데
그밖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좋은 사례라거나 꼭 자랑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단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중국술 배갈(白酒)을 맨 처음 즐길 기회를 가진 한국인도 역시
백이십여 년 전 인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록을 찾지 못해 이렇게 추측하듯 이야기하지만,
자장면의 발상지가 인천이라는 사실과 관련해 보면 신빙성이 있을 듯하다.
개항과 더불어 지계(地界)가 설정되면서 청국 거상(巨商)들이 입항하고, 쿨리(苦力)들 또한 신천지 인천에 밀려든다.
따라서 불과 몇 년 안에 인천 북성동 일대에는 국내 최초로 작은 청국이 형성된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그들의 술이나 음식이 들어오게 되고, 급기야 그런 것들을 판매하는 업소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 호텔이었다가 1915년 청요리 집으로 바뀌어 60여 년간 명성을 날렸던 중화루(中華樓)에는
서울에서까지 손님이 내려왔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유명한 요리점 공화춘(共和春)과
후에 동흥루(同興樓)로 바뀐 송죽루(松竹樓)가 문을 열고, 애관극장 옆 평화각(平和閣), 빈해루(濱海樓) 등이
개업하면서 인천은 명실공히 청요리의 본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천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의 배갈이나 노주(老酒), 황주(黃酒) 같은 술을 먼저 맛보게 되고, 더불어 짜바케나 양장피, 혹은 유산슬, 해삼탕 같은 요리도 다른 지방 사람들에 앞서 먹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입증하듯 60년대까지 인천 시내 요지에는 오래된 중국집들이 즐비했다.
중학생 때 벌써 신성루(新盛樓) 골방에서 여학생들과 두근거리며 탕수육을 먹던 것도,
대학 시절에는 툭하면 평화각 3층으로 몰려가 자장면 한 그릇에 배갈을 몇 도쿠리씩 들이붓는 만용을 부리던 것도
그 한 예일 것이다.
요즘 다시 북성동 청관이 흥청거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 이 집들에 얽힌 재미난 일화들은 다 잊혀져 어딘가 삭막한 느낌이다.
일백이십여 년, 풍운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과 청관 거리.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전국에서 제일 먼저 배갈과 청요리를 먹어 본 사람은
틀림없이 인천 사람들일 거라는 별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시인 eo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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