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

by 형과니 2023. 4. 1.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1 00:43:30

 

김윤식의 풍물기행-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

 

 

한국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 인천 중앙동에 있던 세창양행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1896년 김윤식(金允植)이 주동이 되어 폐간된 한성순보에 이어 한성주보(漢城周報)를 발간하는데,

그 제4222일자에 한문으로 된 세창양행의 광고 기사가 처음 실린다.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한 광고의 효시로 기록된다.

 

여기서 덕상(德商)이라는 말은 독일 상회라는 뜻으로 독일을 한자로 덕국(德國)이라 했기 때문에

덕국상회(德國商會)’ 정도를 줄여서 쓴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또 고백이라는 말은 당시 쓰이던 중국식 표현으로 광고라는 말에 해당한다.

 

광고라는 말은 후에 일본 신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쓰이게 된다.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흰담비, , ,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 , 돼지의 갈기털, 꼬리, ,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 뮤직박스,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염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판매하오니 모든 귀한 손님과 선비와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창양행의 광고 문안이었다.

 

장황하게 긴 문장으로 써 내려간 광고를 보면서 우리는 개항 초기 무역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세창양행에서는 조선으로부터 동물의 모피나 담배, 조개, 소라 따위의 농수산물을 싼값에 사가는 대신

서양의 각종 흥미로운 공산품과 직물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 상황과 산업 형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거래할 때 아이나 노인이 와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낼 만큼 기민한 그들의 상술과 질 좋은 상품에 의한 경제 침탈을 우리는 막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독일의 물감과 바늘, 그리고 이 광고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금계랍(키니네)6.25 전쟁 후까지도 가정 상비품으로서 여인네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세창양행은 7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광고를 계속한다.

이듬해 독립신문에는 수마트라산 수입 석유 판매 광고, 화륜선으로 평양을 다니는 화물객선 창룡호,

상해로 떠난다는 현익호 운항 광고를 내는 등

가장 많은 한글 광고를 실으면서 인천 땅 제물포를 거점으로 매우 적극적인 경영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시인 eoeul@hanmail.net

 

 

==================================================

 

광고주

 

·金文聖 한국광고주협회 부회장

 

I. 구한말 시대(18861910)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광고를 1886222일자 한성주보에 실린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의 광고라고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주는 외국기업이 된다. 개화기인 한말에 초기광고의 주종을 이룬 상품은 외국상품이었으며 한말 최대의 광고주는 외국기업이었다. 개항과 함께 밀려들어온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 외국상사들은 조선 시장의 쟁탈을 위해 광고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을 비롯한 이들 외국 국적의 광고주들이 우리나라에 광고의 개념을 전파하였으며, 광고매체로서의 신문의 활용, 그리고 신문 경영상의 광고의 중요성을 알렸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 유입된 상품은 주로 직물, 피복, 염료 등 의류품으로 전체 유입액의 85.1%를 차지하였다.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것은 영국 및 미국산의 면직물로 근대적 기계제품과 함께 한국으로 수입되어 재래의 수공업은 많은 타격을 입었다. 면직물 다음으로는 석유가 중요한 수입품의 하나였다. 수입품 가운데 신문에 가장 많은 광고를 실은 것은 표백제 및 염색약, 담배였다.

외국상품 광고는 대체로 일본, 청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순으로 활발하여 당시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서열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이들 외국상인들 중 대표적인 것이 외국으로부터 면제품을 수입하는 한편 국내의 홍삼, 금 등을 수출하는 무역상사인독일의 세창양행(Edward Meyer & Co.), 조선산 미곡수출상 러시아계 함릉가앙행(Homely Ringer & Co.), 선박, 화약의 수입판매상인 미국계 사운선양행(Townsend & Co.), 영국계 무역업체인 이화양행(Sardine Matheson) 등이었다. 이 시대의 주된 광고주인 일본 상인들의 업종은 주로 서양 면직물 판매, 전당포, 잡화점, 약재상, 무역상 등이었는데, 세창양행의 광고가 실리고 있던 기간 한성주보에 염색약 제조법에 관한 광고, 양목(洋木), 양사(洋紗), 양단 등의 옷감과 쌀, 조 등의 곡물을 판매하는 상점광고를 싣고 있다. 이러한 외국상품광고에 비해서 한국인들의 광고는 상품을 알려 팔려는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 사소한 분실광고나 구인광고, 감사광고, 부고광고, 의견광고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인들은 광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제약광고, 학교와 강습소의 학생모집광고, 인쇄소와 서적광고 등이 늘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광고가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독립신문에 게재된 광고는 대체로 영문광고가 많았는데, 영문광고주는 대부분 외국의 잡화상이거나 무역상이었다. 1896년부터 1899년 폐간까지 이 신문에 게재된 광고를 살펴보면 기업고지, 학교·병원·기타서비스업광고, 정부기관광고, 동업지광고 및 사고(社告) 등의 비상품광고(151)가 일반상품광고(137)보다 많았다. 상품광고 중에 가장 많은 것은 약품광고(47)였고, 다음이 의류광고(28), 책광고(20),식품광고(18) 등의 순이었다. 약품광고는 독립신문 시대뿐만 아니라 그 후의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에서도 가장 많이 취급된 업종이었다.

 

1896117일자 독립신문에 난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금계랍'광고는 우리나라 약품광고의 효시로서, 이후 우리나라의 광고산업 100년사를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약품광고가 활발해진 것은 1897년 평양에 동화약방을 설립한 민병호의 활명수가 크게 호평을 받자 1910년대 한방에 의한 제조매약업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일본 등지에서 각종서양의약품이 수입되고 또한 서양의약과 한방을 혼합한 매약이 주로 발매되면서 매약광고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의약품 광고주는 이경봉의 남대문 제생당약방(濟生堂藥壽)과 이응선의 종로 화평당대약방본포(和平堂大藥房本鎬)였다. 이들은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광고를 담당하는 전문 광고인을 둔 선구적인 광고주들이었다. 청심보명단을 제조, 판매하였던 한말 최대의 광고주인 제생당약방의 이경봉은 일찌감치 광고의 효과를 깨닫고 이를 적극적으로 판매에 활용한 선구자로서 우리나라의 초기 광고발달에 기여하였다.

 

1899년 인천에서 제생당약방을 창업한 그는 1907년 서울로 본사를 옮긴 뒤 1909년에는 이 약방의 영업부에 광고부를 두고, 광고부 주임까지 임명하였다. 1904년 화평당을 설립한 이응선은 선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업비의 태반을 광고비로 활용하였으며, 광고도안을 위한 부서까지 설치하고 중역선전부장에 추월색을 쓴 신소설 작가인 최찬식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당시 광고도안과 문안의 일인자였다. 1910년 화평당의 광고에는 무려 29종의 다양한 약이 열거되어 있었는데, 영신환, 태양조경환, 자양환의 광고는 그 물량면에서도 막대하였고 표현의 다양성과 창의성 등에서 비교적 우수하였다. 약품광고외에 독립신문에는 한영자전, 언문옥편, 성경, 회의진행법, 독립협회월보 등의 서적광고 및 신문광고가 자주 눈에 띄었다. 또한 각종 서양식품들이 영문광고로 출시되는 예도 많았으며, 노한(露韓)은행과 대한은행의 창립광고, 외국인들을 위한 임대주택광고, 외국의 옷감, 양복 등의 수입의류광고도 게재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갓, , 옷 등 전통적인 국산의류도 광고면의 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II. 일제 시대(1910-1945

 

 

 

 

김윤식의 인천 풍물기행

웃터골 학교와 길영희 선생

 

웃터골 학교라고 하면 무슨 말인가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를 우정 그렇게 불러 본 것인데,

사실 웃터골이라는 곳이 곧 이 학교 교정이다.

 

자유공원에서 기상대로 돌아가는 이 웅봉산 분지를

옛 인천 시민들은 웃터골이라고 불렀다.

시내 어디서 보아도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이 골짜기가 높아보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1920년에서 35년까지 15년간 웃터골은 인천 공설 운동장으로 쓰였다.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과

단장 곽상훈(郭尙勳)씨의 일화가 생생히 전한다.

 

고일(高逸) 선생이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는데,

이런 정신을 이어받았던지 후일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해 인천의 명문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인천중학교는 평준화 시책 때문에 없어졌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는데,

이 두 학교가 다 그 유명한 3·1 독립 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에 의해 개교했다.

단순한 개교가 아니라 대한민국 백 년 교육이 나아갈 바,

방향을 제시한 개교이면서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그런 개교였다.

 

길영희 선생의 웃터골 학교는 교훈을 교실 벽에 써 붙이지 않는 학교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이 구전(口傳) 문구가 교시이고

강당 편액 속의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 이 글귀가 교훈이었다.

 

더불어 일체의 허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그분이 지향하는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한국 초유의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물론 혹자는 그분의 영재 교육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혼란과 황폐 속에 신음하던 이 나라 재건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던 것이 인재 양성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정의와 양심으로 민족을 이끌 영재! 이것이 그분 교육의 이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생이 계셨다면 오늘의 한국 교육 현실을 뭐라고 하셨을까.

 

오늘 1127일로 개교 50주년을 맞는 인천 웃터골 학교.

웃터골 학교는 좋은 목수가 동량(棟樑)을 고르던 학교였다.

/시인 eoeu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