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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1907년의 인천

by 형과니 2023. 4. 9.

1907년의 인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05-31 22:45:16


1907년의 인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1907년은 3년 후 일본에 병탄당하게 되는 나라의 운명이 막다른 골목에 빠져있는 때였다. 고종황제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참석이 좌절되고 오히려 황제는 양위하게 된다.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도 일헌병이 장악한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강화 진위대 장병들도 떨쳐일어나 강화성을 점령한다.

인천에서는 두건의 큰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3월 신포동에서 큰 불이 나 400호가 전소되고 연말에는 인천항에서 20호가 전소되었다. 일본군 12사단이 인천에 주둔하고 이완용이 주안염전을 시찰, 일본의 황태자가 인천에 도착했다. 우리 황태자 이은이 일본에 유학차 내인한것은 그해 12월5일이었다.

형편이 그랬던 만큼 일인들의 횡포도 우심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사료에 의하면 신창동(오늘의 답동) 주민들이 일인 지주의 횡포에서 구해달라고 성당에 탄원서를 내고 있다. 탄원서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들은 원래 사방 떠돌아다니며 살던 사람으로서 이 항구에 도착하여 일본인 무라다니의 토지 위에 집을 짓고 근근히 생활해 오던 중 재작년부터 지주가 이 땅을 우리더러 매입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수천원에 달하는 돈을 어떻게 쉽사리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까지 버티어 왔는데 지주가 땅을 매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가옥을 모두 허물라고 합니다.…밝게 살피시어 하해같은 은택을 특별히 내리시어 이 땅을 매입하여 우리에게 주시면 이로써 많은 인민들이 다시 생활할 수 있겠습니다.>

그 해 뜻깊은 사건도 있었다. 인천에 우리 정부에 의한 첫 보통학교도 문을 열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즉 오늘의 창영초등학교이다. 당시 인천의 인구는 외국인을 포함하여 3만명을 넘었다. 이 해에 화수동에 화도감리교회도 설립된다.

그곳에 거주하던 내리교회 교인들을 주축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인데, 2년 후 그곳에 있던 관우의 사당터를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듬 해인 1908년에는 인천공립여학교 즉 오늘의 인천여자고등학교도 문을 연다. 바야흐로 인천에 신문화와 신학문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화재 #인천 #중구 #1907년의인천 #신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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