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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화재

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by 형과니 2023. 6. 19.

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2011-06-14 16:54:16

 

 

188545일 그날은 마침 부활절이었으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날 오후 비를 맞으며 일단의 젊은 미국인들이 인천항에 상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입국하는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장로교의 언더우드였다.

 

그 장면을 아펜젤러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셋중 그의 아내가 제일 먼저 한국 땅을 밟았으며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히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갑신정변 여파로 우여곡절 끝에 입경한 그들은 서울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세웠다.

 

특히 서울의 서부지역에 주목한 감리교 선교부는 인천에 기지를 설립한다. 우각리 일대의 땅을 매입 교회를 세우고 영화학교와 선교사 주택을 건립하고 이를 에즈버리라 명명했다. 에즈버리란 미대륙에 감리교를 처음 선교한 영국인 선교사의 이름이었다.

 

내리교회가 위치한 시내 중심지를 마다하고 변두리로 결정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내리 일대의 땅값이 개항직후 폭등했으며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근에 우각역이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창영교회가 자리한 창영동 42번지를 비롯 금곡동 58번지 일대와 송림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1930년대 창영동에 3동의 서양식 건물로 남게 된다. 즉 남 여선교사의 숙소 그리고 아펜젤러의 숙소였다.

 

아펜젤러 숙소는 그후 한전에서 매입 변전소가 되었다가 지금은 모 교회가 되었다.

남선교사 숙소는 1942년 정미업자 주정기씨가 매수했는데 몇차례 전매되어 그 자리에 지금 인천세무서가 자리하고 있다.

 

나머지 여자숙소가 현재 인천시 지정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중략)

 

오 광철의 전망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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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8(동구)

 

명 칭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仁川基督敎社會福祉館)

분 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근대산업생산/ 숙박·음식업

수량/면적 1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동구 창영동 42-3

 

소 유 자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

관 리 자 감리교회사회복지재단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동구 문화공보실 032-770-6104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시설하였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派送)한 여선교사(女宣敎師)들이 합숙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외형은 간소한 상자형으로 지붕구조가 독특하며 벽체 구조는 적벽돌을 석회 몰타르로 쌓은 근세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으로 18세기 영국 저택(低宅)과 흡사하며 지붕은 함석(양철)으로 덮었고 내부는 목조로 건축하였다. 특히 창호(窓戶)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서원(書院)이나 사찰(寺刹)의 승방(僧房)등에서 사용하던 용자(用字)살을 원용하고, 가장자리는 교살(빗살)모양으로 살을 짜 넣었다. 또한 2층 실내 구조는 가로축에 지하로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