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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동이야기

만석동-근대화, 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by 형과니 2023. 6. 22.

만석동-근대화, 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11-12-23 12:46:55

 

근대화, 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만석동은 한 세기 전 인천의 신도시였다. 일제는 갯벌을 메우고 산업단지와 위락시설을 유치하면서 신천지의 꿈을 키웠다. 이로 인해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던 괭이부리(묘도)는 깡그리 파헤쳐져 지도 속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는 아카사키라는 일제의 쇠말뚝이 박힌다. 바다로는 피란민을 받아들이고 육지로는 농촌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만석동은 이제 쇠락한 포구 하나 가슴에 부여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우리시는 인천의 대표적인 쪽방촌인 이곳을 리모델링과 공동작업장 설치 등을 통해 재개발을 하더라도 현재 살고 있는 주민을 100% 재정착 시킬것이다. 이는 도시재생사업의 새로운 모델이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매립지 살리기 위해 창녀촌 유치

 

시계바늘을 100년 전으로 돌려보자. 경성을 떠난 지 두 시간을 힘차게 달려 온 철마는 철길 옆으로 해변이 길게 뻗은 종착지 인천역에 다다른다. 마중 나온 갈매기 한 마리가 열차 위를 선회하며 길을 안내한다. 열차는 질주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시원한 해풍으로 씻어낸다. 오른쪽 차창으로 흰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한가롭게 떠있다. 멀리 솟아 있는 영종도와 강화도는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해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모습은 100년 전 만석동 풍경이다.

 

만석동의 본래 태생은 바다. 현재의 만석동 대부분은 갯벌을 메워 만든 땅이다. 바다와 접한 만석동은 1900년 초 만해도 조선인 20~30가구만 사는 아주 한적한 마을이었다. 이곳을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稻田)19069월 만석동 앞의 갯벌을 메웠다. 이 매립으로 약 50(15만평)의 새로운 땅이 생겼다.

 

그는 조선인 집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정미소와 간장공장을 유치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립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던 이나다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보게 된다. 고심 끝에 그가 내놓은 방안은 유흥업소 유치였다. 당시 선화동에 있던 창녀촌 부도유곽을 본떠 묘도유곽을 설치했다. 묘도는 만석동 앞바다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매립지에서 묘도 가는 길에 2층짜리 객실 6,7채를 만들고 구릉지에 해수탕과 고급 음식점을 갖춘 팔경원이란 위락시설을 세우는 등 주위를 홍등가로 만들었다.

 

구릉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재의 만석교회 뒷마당에 서 보았다. 주위에 비해 살짝 높지만 시야가 트여 전망이 좋은 편이다. 조선총독 이토히로부미는 인천에 오면 이곳 팔경원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술과 여자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고 사람들이 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이곳은 너무 외져서 이토의 발길도 지역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 땅은 중국인들의 채소밭으로 전락하거나 대부분 오랫동안 잡초 무성한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만석동 매립지에 본격적으로 공장이 들어선 것은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라고 자랑한 이 공장은 1934101일 종업원 3천명에 직조기 1292대로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쌀 2되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조선인들은 동양방적에 들어가길 원했다. 유니폼 입은 종업원들은 스스로 동대(東大)’에 다닌다고 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지녔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출신 영화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단했제. 우리 큰 딸이 동일방직에 다녔는데 그 애 덕분에 동생들 다 공부했어. 월급날에는 이 일대가 하루 종일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 46년 전 전남 남원에서 올라와 만석동에 정착해 6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살고 있는 김성순(78) 할머니의 설명이다.

 

이 공장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한 획을 긋는 현장이 된다. 유신말기인 1978년 여성노조원들은 이른바 똥물테러를 당한다. 이 똥물은 부메랑이 되어 유신정권이 뒤집어쓰게 된다.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이 공장은 이후 섬유업 퇴조에 따른 생산시설 이전 등으로 만석동 시대를 서서히 접고 있다. 기다란 공장 담장 안에서는 여근로자들의 재갈거림 대신 늦여름 매미 소리만이 한가롭게 넘어왔다.

 

이젠 도시의 뒤켠으로 물러나있지만 바다는 아직도 만석동 주민의 젖줄이다. 이곳을 출항해 영흥도, 덕적도 등에서 바지락, 주꾸미 등을 잡아온다.

 

잠수함 만들던 동네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를 빼놓고는 만석동을 얘기할 순 없다. 이 회사는 19376월 광산용 기계 생산업체로 설립되었다. 공장 터를 조성하면서 괭이부리섬으로 불린 묘도(猫島)를 깡그리 뭉갠 것으로 보인다. 그 위치는 현재의 삼미사 혹은 옛 한국유리공장 앞 도로 부근으로 추측된다. 당시에는 육지의 끝 지점이다. 바다의 길목 묘도에는 조선의 포대가 있었다. 포대는 강화와 한강으로 향하는 이양선(異樣船)을 향했다. 분도, 사도, 원도(낙섬), 아암도, 청라도, 율도, 소월미도. 묘도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진 섬들이다. 이 섬들이 살아있다면 인천은 아름다운 다도해(多島海)였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인천을 대륙병참기지로 삼는다. 19434월 말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육군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잠수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사(宿舍)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아카사키촌의 근간이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화장실도 없는 쪽방으로 집을 지었다. 골목은 딱 어른 어깨 넓이다. 60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근로자들이 묵었던 왜색풍의 집들이 힘겨운 채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전히 공동변소를 사용한다.

 

잠수함 1호기는 명령받은 지 1년 만에 제작돼 진수되었다. 해방될 때 까지 총 4척의 잠수함이 만석도크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갔다. 광복을 맞아 진수되지 못한 두어 척의 잠수함들은 60년대 초반까지 도크에서 녹슨 고철이 돼 나뒹굴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은 만석동을 잠수함 만들던 동네라고도 불렀다.

 

현재 아카사키촌에는 294동 판잣집에 548명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모여 살던 이 동네는 해방 후 6·25 전쟁 중에 주로 배를 타고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정착했다. 이어 6,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터전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을거요. 옛날 판유리공장 뒤편에 나가면 바지락이 지천이었는데 그거 잡으며 살았지. 그거 팔아도 충분히 먹고 살았으니까. 나중에 인천시 도움을 받아 5톤짜리 조그만 뗏마() 40척을 만들어서 주민들과 같이 낚시배 부리면서 살았어요.”

 

이용준(84) 양순옥(81) 노부부는 아카사키촌의 터줏대감이다. 난리통에 황해도 옹진군에서 피난 나와 고향으로의 귀환을 꿈꾸며 이곳에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만석동은 80년대 까지 반어반노(半魚半勞)의 동네였다.

주인집은 배를 부리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은 공장에 다녔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만석동에 비치가 있었다. 지금처럼 빡빡하게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갯벌과 모래가 뒤섞인 바닷가를 끼고 있었다. 그걸 추억이라도 하듯 2002년에 재개발된 고층아파트의 이름을 만석비치타운이라고 지었다.

 

만석동 쪽방촌의 터줏대감이자 산증인 이용준·양순옥 부부. 20년 전 인천시로부터 받은 표창장을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만석동이 품은 부두와 섬

 

만석동이 바다를 완전히 잃은 게 아니다. 여전히 부두와 섬을 품고 있다. 질펀한 부두의 옛 정취는 다 사라졌지만 이곳을 통해 사람들은 바다로 나간다. 강화 동검도와 마주하고 있는 세어도를 가려면 이곳에서 하루에 한 번 왕복하는 행정선을 타야한다. 이제 이곳은 낚시배들의 출항지로 변모했다. 지난 816일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이었지만 아침 7시경 30여 척의 배로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다로 나갔다.

 

지금은 낚시철이 아니라 대신 영흥도, 자월도 등에 가서 조개들을 캐와요. 재미로 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직업인 사람도 있는 거 같아요. 오후 5시경에 돌아오는 데 배에서 내린 조개가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해경 만석출장소의 정지범 수경의 설명이다. 바다로 나가려면 이곳에서 승선신고를 해야 한다.

 

만석부두에 서면 마치 봉분처럼 봉긋 솟은 섬이 하나 보인다. 멀리뛰기라도 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약도다. 작약도의 행정구역은 만석동이다. 이 섬은 이번에 만석동 작약로라는 새주소를 얻었다. 일제가 매립하지 않고 섬으로 그대로 둔 게 고마울 따름이다.

 

공장지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갯벌 위에 레일이 깔려 있는 등 다소 낯선 바다가 나온다. 후미진 그 바닷가에는 우리가 도시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선박을 만드는 중소 규모의 조선소가 있고 그 옆으로는 고장난 배들을 수리하는 일종의 선박병원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 선박을 해체하는 도크도 있다. 수만리 바다를 항해한 여객선, 화물선 등이 그 생명을 다하고 장기가 적출되는 현장이다. 이렇듯 만석동 뒷바다에는 요람부터 무덤까지 선박의 일생이 있다.

 

오랜만에 햇살이 쨍한 만석부두가에 널린 망둥이들도

선탠하며 고들고들 익어간다.

 

50년 된 만석우체국

 

경인선 철로에 양쪽으로 이웃한 만석동과 송월동은 같은 생활권이었다. 주민들은 철도간수가 지키고 있는 건널목을 건너다니며 부두로 공원으로 서로 자유롭게 교통했다. 19629월에 문을 연 만석우체국은 두 동네가 만나는 길목에 있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어부가 뭍에 나와 맨 먼저 달려온 곳도 이곳이고 한 달 봉급을 받은 공장 근로자도 먼저 발길을 돌린 곳도 이곳이다. 그들은 부모님전상서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내거나 우편환으로 고향에 돈을 붙이기도 했다. 그들의 꿈은 만석우체국에서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던 중 안전을 위해 철로변에 차단벽이 세워지고 그 위로 만석고가도로가 생겼다. 단절은 곧 퇴락으로 다가왔다. 발길이 끊긴 우체국은 이제 만석동과 같이 그렇게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만석동이 품고 있는 작약도. 바다에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그 섬은 이 땅의 아픔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