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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인천 양조장

by 형과니 2023. 6. 23.

인천 양조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12-23 13:36:58

 

1920년대 인천 양조장만 21

 

글 김윤식 시인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50~60년대 발행된

와룡소주 상표

 

 

개항 이후 인천이 미곡 집산지가 되면서 정미업이 발전하게 되었고, 정미업에 뒤이어 양조업이 발전한 것도 역시 술의 원료가 되는 미곡의 풍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급격하게 늘어난 인천의 인구 증가와 1차 세계대전 전쟁 호경기도 인천 양조업의 활황을 부추기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910년 총독부의 정식인가와 함께 미두취인소가 성황을 이루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려들었고, 거기에 인천항 축항 공사가 각지의 노동 인구를 집합시키면서 술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늘어났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인천으로 몰려들어 많은 인구 증가를 가져 왔으니 그것이 또한 술의 소비를 증가시킨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인천의 한국인 인구는 대략 24천 명, 일본인 인구는 13천 명 정도였는데 이미 한국인 양조장 14개소, 일본인 양조장 7개소 등 무려 21개소의 양조장이 세워진 것을 보아도 술 소비의 증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인 양조장에 대해서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인천 한 세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20년 전후에 많은 양조장이 시내 각처에 생겨났다. 대동양조조합, 영화양조조합, 인천양조조합 등 법인체에서부터 대일양조장, 김휘관양조장, 영춘양조장, 신창양조장, 소성양조장, 대화양조장, 계림양조장 등 소규모 개인 업체에 이르기까지 14개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일·풍전

양조장에서 사용하던

술통(청주, 정종)

 

이 중에서 양조업계의 선두 주자로 떠오른 인물이 최승우(崔承宇)였다. 최승우는 원래 객주업으로 치부를 한 사람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당국의 권유에 따라 외리(지금의 중구 경동)에 대동양조조합을 설립하고 약주와 탁주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영업 신장은 기민한 경영 수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재래식 양조법에서 탈피, 재빠르게 시설을 개수하고 신제품을 개발했다. 일본식 압착 여과 장치를 도입해서 정종처럼 맑은 병 약주를 생산해 내었는데 이것이 큰 히트였다. 이 병 약주의 대량 생산을 통해 대동양조조합은 일약 1급 양조업체로 발돋움하게 된다.

 

병 약주 개발에 대해서는 신 박사도 고 고일(高逸) 선생도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 최승우가 방부제를 써서 병술 약주를 제조했다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인용한 순서대로 신 박사와 고일 선생의 기록이다.

 

받침술 시대부터 용동추탕집으로 유명했던 영화양조조합, 일본 청주처럼 맑게 여과하고 처음으로 송로(松露)’란 상표를 붙인 병술 약주를 개발한 대동양조조합, 판매량으로 뛰어났던 인천양조조합과 대화양조장 등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방부제를 써서 최초로 조선 약주를 일본 정종같이 맑은 청주로 만들던 대동양조주식회사가 광통사 뒷집에서 송림동 최응삼 씨 댁 부근으로 옮겨 가서도 제조에 힘썼으나, 때가 불리해 자연 폐업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약주의 품질을 향상하는 데 결정적 신기원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최승우가 과연 인체에 해로운 방부제를 사용했는지, 사실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조선 약주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결정적 신기원을 마련한것인지, 논리가 아리송하나 당시 세간에는 그 같은 이야기가 돌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최승우는 소주 제조에서도 역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인 양조장 조일양조주식회사에서 기계식으로 금강이라는 소주를 만들어 크게 재미를 보자 최승우는 뒤질세라 1928년 송림동, 옛 동부경찰서 인근에 공장을 신축하고 대동이라는 소주를 출시한 것이다. 대동소주는 1930년대 말 전시 체제로 술이 배급제가 될 때까지, 그에게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으며 인천 5대 소주 공장의 하나로 인천부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신태범 박사의 선친 되시는, 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의 신순성(愼順晟) 함장이 최승우와 동업을 했다가 실패했다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 함장이 은퇴 후 최승우의 소주 양조장에 투자하여 동업을 했는데 그만 적지 않은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갑자기 기울어 간 쓰라린 한이 서려 있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신 박사가 실제로 기록한 바 있다.

 

최승우는 당시 인천 경제계 중추로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또 동산중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 참여했는데, 특히 학교 부지에 관해 인천의 부호 최승우 옹이 흔쾌히 내놓은 토지로 현 송림동 서림국민학교 동쪽에 새 교사를 건축, 이전하여 상업전수학교로 재출발했었다.”는 언급이 인천석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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