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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60) 한국 최초 판유리공장

by 형과니 2023. 6. 26.

(60) 한국 최초 판유리공장

2013-09-16 10:25:32

 

폐허로 남은 '유리산업 메카'

(60) 한국 최초 판유리공장

 

한국에 있어 유리공업은 주원료인 규사의 무진장한 매장량과 전국(38이북 포함) 35만 상자라는 방대한 수요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공업적인 기물류 유리제품만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특히 판유리는 작년도 수입량만 해도 56000상자(밀수입도 상당한 양)라는 막대한 수량일 뿐 아니라 정부 5개년 수출입계획에 의하여 제1년도에 2,691톤인 5,950불의 수입을 예정하고 있는 등의 현상에 비추어 판유리 공장의 급속한 건설이 국가적으로 요청되어 관계 당국에서도 이에 대하여 작년도부터 ECA 당국과 누차 교섭하여 오던 바 드디어 작 23일 최후의 합의를 보고 오는 41일부터 한국판유리공업주식회사(가칭) 공장 건설에 착수하리라 한다.

 

동 건설계획에 의하면 ECA당국에서는 동 공장 건설자금으로 100만 불을 원조하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5억 원을 출자키로 되었다 하는데 건설기간 중(1950~51)에는 미인 기술자에 의하여 지도 관할하고 완성 후에는 정식 한국정부에 이양하리라 한다. <중략>

 

한편 동 공장 운영에 대한 주요 역원은 다음과 같다. 박흥식(朴興植), 김현수(金玄洙), 안동원(安東源), 서선하(徐善夏), 전용순(全用淳), 기술진 김동일(金東一, 공대교수), 남기동(南基棟, 중앙공업연구기사), 백윤방(白潤邦, 상공부공업국기사), 장석원(張錫元, 동양유리사장), 김만종(金萬鍾, 현 미국무연탄연구소 촉탁).”

 

위의 글은 <공업신문> 1950324일자 한국 최초의 판유리공장 인천에서 착공이라는 제하의 기사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6·25 발발 꼭 3개월 전의 일로 광복 후 맨바닥 같은 우리나라 공업 현실과 이를 탈피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국내외 판유리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 회담을 미국 경제협조처 ECA와 벌인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인천에 최초의 판유리 공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유리의 주원료로 쓰이는 규사가 무진장하게 매장된 섬들이 인근에 산재해 있는, 천혜의 공장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천판유리공장 건설 계획은 전쟁으로 무산되고, 195210월 백두진(白斗鎭) 당시 재무장관이 유엔한국재건단의 재건사업 계획을 발표하면서 다시 공사 착수를 밝힌다. 그 후 1954625UNKRA 기금에 의한 공장 건설 협정 조인이 이루어지고, 19576월 우리나라 최초로 연산 12만 상자 규모의 인천판초자공장(仁川板硝子工場)이 준공되어 우리나라 판유리 산업의 시발이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 속에서 허덕이던 19571024일의 한국유리 인천공장, 한 줌의 모래가 섭씨 15백도의 불을 만나 유리가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풀콜 용해로를 붙잡고 버틴 7개월, 사람들은 가슴 벅찬 설렘으로 땀의 결과를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인상기 상단에는 유리가 솟아오르고 감격의 순간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일순간 유리는 깨지고 주위는 적막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유리가 다시 올려지고 완성품이 탄생했습니다. 이 유리는 우리나라 원료와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판유리였으며, 인천공장은 우리나라 유리산업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리 기업 한글라스는 회사 연혁에 인천공장을 한껏 추켜세우듯 기록하고 있지만, 벌써 서울로 떠나버리고 옛 만석부두 앞 인천판유리공장은 이곳의 사진작가 김보섭의 앵글 속에 폐허로만 잡혀 있을 뿐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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