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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마담과 레지의 상술

by 형과니 2023. 6. 24.

20.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마담과 레지의 상술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1:48:41

 

그녀들의 발칙한 영업전략

20.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마담과 레지의 상술

 

 

신문에 실린 '월미다방'광고.

 

 

전 회에서 "'사장님'은 자기 돈으로는 종일토록 차 한 잔밖에 마시지 않지만 그를 만나러 오는 '손님들'의 차 매상이 다방에 납입되는 그날그날의 자리 값이요, '사장님 수발' 대가"라고 했지만 '사장님'은 가끔씩 한가한 시간을 틈타 마담과 레지를 불러 앉혀 놓고는 쌍화차 같은 고가의 차를 한 잔씩 베풀기도 한다.

 

또 어쩌다 '사장님'이 꽤 괜찮게 수입을 올리는 경우 그에 상응하는 보너스가 마담과 레지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적당한 간식을 사다 카운터에 올려놓거나 '세게는' 청요리를 배달시켜 그동안의 노고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둑해진 주머니 과시이면서 '직원'들을 잡아 놓는 환심 작전인 셈이다. 마치 회사에서 월별, 혹은 분기별로 직원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베푸는 회식 자리라고나 할까. 물론 이들 여인들이 비번인 날은 개봉관 영화 구경을 시켜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공생 관계는 피차 이득을 주고받는 선순환(善循環)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마담과 레지는 이 무렵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다른 다방들과 손님 유치 경쟁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진을 치고 앉아 사업을 벌이는 '다방 사장'이나마 많이만 있어 준다면 더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그에 대해 '다방 사장' 쪽은 친절하고 나긋나긋하게 대접해 주고 열심히 여직원 소임을 다해 주는 마담, 레지가 절대 필요한 존재이면서 무상이나 다름없는 '사무실, 응접실' 제공에 늘 고마운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실린'오아시스다방'광고. /김효선 촬영

 

 

그러나 '다방 사장'들이 매일 어느 정도의 매상을 올려 준다고는 해도 실상 아주 번거로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수시로 담배 재떨이 비우랴, 엽차 나르랴, 시도 때도 없이 메모지 대령하랴, 어지러진 신문지 수습하랴, 의자 등받이 커버 바로 잡으랴……, 종일 이들 수발에 여간만 손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다방들은 이들을 고정 고객으로서 잡아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특히 1960~7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전국 도시마다 '자고 나면 생기는 것이 다방'이라거나 '한 집 걸러 다방'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방이 흔했던 터라 영업 경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초·중반 시절 인천만 해도 시내 다방은 무려 133곳에 달했다. 절반 이상이 중구 신포동, 중앙동, 관동 지역과 경동, 용동, 인현동 관내에 분포해 있었으니 한정된 손님 수에 비해 다방 밀도가 엄청나게 조밀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쟁 상대들이 자꾸 생겨나면서 다방들은 실상 '다방 사장' 부류 몇 사람에게만 목을 매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연히 일반 손님들, 특히 어쩌다 들른 뜨내기 손님에게까지도 절대 소홀할 수가 없고 그들 관리에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했다. 그 손님들을 기필코 자기네 단골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혈안이 되었다고 표현할 만큼 다방 간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기록에 보면 이미 광복 이후 1940년대 후반부터 이미 다방의 메뉴가 되어 온 모닝커피가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더욱 다방 간 경쟁의 한 도구로 활용되었던 듯 싶다. 어쩌다가 달걀 노른자가 커피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또 누가 이런 종류의 희한한 메뉴를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커피에 달걀 노른자를 넣는 것이 모닝커피의 정석이었는데 이런 평범한 모닝커피를 내놓는 다방을 따돌리기 위해 노른자를 두 개씩 넣는 다방이 생기고, 심지어는 노른자가 든 쌍화차를 내놓는 다방까지 생겼던 것이다. 또 개중에는 달걀 반숙을 내놓거나 프라이를 서비스하는 다방도 있었다. 모닝커피 외에도 우유를 기호(嗜好)하는 손님에게는 따스한 밀크 한 잔을 첨가해서 부드럽게 속을 달래 주기도 했다.

 

대학 복학을 하지 못하고 두 해째 낭인처럼 지내던 1973, 아침이면 가끔 도원동 광성중학교 남쪽 비탈 고 최병구 시인 댁 단칸 판잣집에 가서 꽁보리밥에 새우젓, 사시사철 짠지와 고추장 한 종지가 전부인 아침을 몇 숟가락 얻어먹고는 했는데 식사가 끝나면 옛 '수인역' 앞 무슨 다방이었는지, 거기 2층에 들러 최 선생과 무상으로 모닝커피를 마셨다.

 

 

 

다방의 주인인 마담과 일명 레지라고 부른 종업원은'사교계의 꽃'으로 다방을 찾는 사람들의 좋은 말벗으로 인기가 높았다. /사진제공=국제다방

 

 

마담은 최 선생의 기행(奇行)을 염려해 두 말 않고 달걀을 넣은 모닝커피 두 잔을 내놓았지만, 곁에서 그것을 억지로 얻어 마시던 젊은 입장에서는……. 그러나 그런 편치 않은 모닝커피를 마시면서도 최 선생 같은 분만은 꼭 모닝커피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최 선생은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 검은 색안경, 그리고 파이프 담배가 작은 체수에도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오늘 최 병구 선생도, 보리밥도, 모닝커피도, 그때 그 다방 마담도 다 그립다. 갚을 길 없는 그때의 행적이 미안해서 더 아프고 그립다.

 

각설. 그밖에 손에 들리는 실물 홍보물로서, 상호와 전화번호가 박힌 성냥갑 제공은 다방마다 필수였다.

 

아이디어 품목으로 경인열차시간표 같은 것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수첩 크기로 인쇄해 손님에게 배포하는 것이다(이미 1960년 중구 신포동 16번지, 허형범치과 옆 건물에 있던 통일다방에서 그해 221일을 기해 변경된 경인열차시간을 재빨리 표로 제작해 배포한 사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거기에 연말이면 일력(日曆) 배포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내 모든 다방이 일력을 사용했는데 대체로 일력은 다방 카운터 쪽에 손님들 좌석 어느 방향에서도 잘 보이도록 걸렸다. 날짜를 표시하는 숫자가 커서 눈에 잘 띄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자잘한 글씨의 달력보다는 글자가 큼지막한 일력을 선호했던 기억이 난다. 잘 보이기도 하려니와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이 일력 종이가 달력 지질보다 훨씬 부드러워 그날의 '뒤지'로 사용하는 득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방들은 이런 식으로 저마다의 특색을 내세워 손님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손님을 맞고 응대하는 마담과 레지가 다방 운영 승패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였다.

어느 다방이나 유능한 마담과 교양 있고 아름다운 레지 영입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 경영이 기업화함에 따라 소위 '가오마담(얼굴마담)'이 다방의 꽃으로 손님을 끈다는 것도 뉴스였다. "중년층 샐러리맨이 많이 몰리는 다방마담은 한복차림으로 홀을 누비고, 젊은 대학생을 상대하는 다방에서는 젊은이에 맞먹는 발랄한 아가씨를 내세워" 핫팬츠가 유행하면 레지들에게도 그 옷을 입힌다는 것. 또 명동의 다방경영 원칙은 "보통 30세 내외의 마담 1, 친절하고 예쁜 20세 내외의 레지 2명과 나머지 1명은 우악스런 아가씨를 끼어 놓는다"고 했다. '우악스런 아가씨'가 왜 필요했는지 궁금해진다.

 

민병욱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의 글인데 '우악스런 아가씨'를 한 명 배치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무렵 다방들의 경영 체제의 일면과 인적 구성, 혹은 손님을 유인하는 수법 등에 대해서 아주 흥미롭게 기술해 놓고 있다.

 

이 인용문에도 보이는 얼굴마담은, 이미 훨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다방 안에서 손님 응대는 물론 다방 관리의 총 책임자이면서 얼굴이었다. 레지는 마담의 보좌역으로 각 테이블마다 차를 나르며 손님 응대의 수완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들이 펼치는 '인해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경영 무기였던 것이다. 물론 다방 안의 여자라고는 마담과 레지 단 두 명이거나 많아야 세 명 정도였으니 인해전술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 듯하지만 그들의 수완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 표현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마담과 젊은 레지 아가씨는 손님에 따라 교태도 짓고 거짓이지만 간혹 미묘한 눈길도 보내고 코 먹은 응석도 섞으면서 단골은 단골대로 안면 정도에 그치는 손님은 또 그런 정도로 꼼짝 못하게 해 놓는 이 상술은 두세 명이라고 해도 영락없는 인해전술이었다. 마담과 레지가 좌우에서 혼을 뺀 뒤 자기들 몫의 음료나 찻값을 얹어 손님으로 하여금 아얏 소리 한 마디 못한 채 계산토록 하는 기막힌 전술을 발휘하는 것이다.

 

주로 변두리나 외곽 쪽 다방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마담과 레지의 서비스가 더욱 발전해 때때로 단골손님에 대해서는 스킨십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손님의 피로를 풀어 준다는 명목으로 팔,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손금 같은 것을 봐 주는 척 옆에 붙어 앉아 손님의 손을 떡 주무르듯 하던 장면이 흔히 목격되곤 했다. 이 경우 남자의 손이 슬며시 여자의 허리 뒤로 돌아가 있음은 물론이다.

 

마담이나 레지와 손님과의 관계는 그것이 종종 예기치 못한 문제로 발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결말은 대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기 일쑤였지만. 그 실례가 신포동에서 옛 신생동파출소 앞으로 건너는 건널목 맞은 편 2층에 있던 모 다방 마담과 유명한 중국집 신성루 뒤쪽의 한 향토국수집 사장과의 1년 여에 걸쳤던 스토리였다. 그 종말은 다행히도 잘 정리가 되어 소담(笑談) 수준으로 가라앉았으니 해프닝으로 그친 것이 틀림 없는데 세인의 입은 한동안 이야기 거리로 삼았다.

 

그 주인공 쌍방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 평온을 회복한 후, 사장 부인의 주도 하에 위치를 옮겨 다시 국수집을 열어 손님이 뜸한 오후 무렵에 가끔씩 들러 새참처럼 국수를 후루룩거리고 있을라치면 그 부인이 앞에 와 앉으며 '댁도 다방이나 술집 여자를 특히 경계하라'는 어이없는 충고를 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사장 위치가 바뀐 그 남편은 손님이 있건 없건 국수를 누르는 주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던 기억도 떠올라 쓴 웃음이 나온다. 이것은 1980년대 초반 무렵 이야기이다.

 

친면이 있는 한 젊은 학자가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도중 생전 처음 목격했다는 선친과 모친의 6개월여에 걸친 불화를 이야기하면서 그 원인이 어느 다방의 젊은 여성 때문이었다며 평생 엄하셨던 선친께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모두가 잘 드러나지 않던 당시 다방들의 폐해라면 폐해였다.

 

배달 커피 형태도 아마 이 무렵에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틀림없이 다방들끼리 경쟁 경영을 하다가 중국집 짜장면 배달이나 과거 인천의 냉면집 배달 방법을 응용해 생겨난 산물일 것이다. 배달을 시키면 레지가 오고가는 수고와 번거로움이 있으련만 이상하게도 다방에서 마시는 커피 값보다 오히려 배달 커피 값이 저렴했다. 이유인즉 주문 전화료를 탕감해 준다는 것이 그 명목이었다.

 

흔히 커피를 배달시키는 곳은 '다방 사장'의 경우와 유사하게 여직원을 두지 못하는 소규모 사무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여기 '사장님''다방 사장'과 마찬가지로 역시 레지 아가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레지는 사무실에 도착해 주문한 잔 수대로 보온병을 열어 커피를 따른 후, 손님들이 마시는 짬을 내서 '사장님'의 테이블을 정돈하고 걸레질을 한다, 재떨이를 비운다, 차일(遮日)을 적당히 내려 쳐 준다, 화분에 물을 준다, 등등의 자잘한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다방에서 끓여 온 한 주전자의 구수한 엽차까지도 사무실 주전자에 가득 옮겨 채워 주고 가는 것이다.

 

이것 모두가 다 발전한 다방 상술의 하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같은 배달 풍습이 후일 티켓 다방이니, 시간제 뭐니 하는 등으로 변질해 사회적 우려를 야기하는 꼬투리가 되었을 것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