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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1.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다방 전성시대의 또 다른 풍경

by 형과니 2023. 6. 24.

21.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다방 전성시대의 또 다른 풍경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1:53:31

 

'단골 의리'지키려"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

21.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의 다방 - 다방 전성시대의 또 다른 풍경

 

이 연재 첫 회 글머리에서 인용한 바 있는 민병욱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의 다방 관련 글은 '시민 대중의 응접실, 대기실, 또는 휴식처였다.

 

단체의 회합 장소요, 미팅이나 맞선 장소이면서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노년들의 사랑방이자 대학생들의 담론 마당이며, 직장인들이 들르는 휴게실이었다.

 

실업자의 연락처였고, 불러주면 사장인 김 사장, 이 사장들의 사무실이거나 비서실이었다.

 

다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시와 미술과 음악에 영혼을 불사르던 예술가들의 전시(展示) 무대인 동시에 아지트이기도 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다방의 최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다방 풍정을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1960년대에도 우리 사회 전반에 다방이 상당히 번창하기는 했지만 '시민 대중의 응접실'에는 조금 미치지 못했고, 노년들의 사랑방이라고 할 정도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방 사장'들이 우르르 생겨난 것도 5·16 이후 연달은 경제 개발 계획 추진에 힘입어 도시 사회가 차츰 발전해 가던 1970년대 이후였다.

 

 

1970년대 인천의 다방 전화번호가 수록된 광고지.

 

다방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거리엔 '한집 건너 하나' 꼴로 다방이 있었고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년의 느끼한 남성이 약간 코 먹은 목소리로 "마담~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운운하며 다방 마담을 꼬드기는 농담마저 전국적으로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는 서민과 항상 마주하는 친숙한 존재였다.

 

이 역시 민병욱의 글인데 1970년대 그 무렵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다방과 당시 다방에서 볼 수 있던 한 풍경을 실감하게 해 준다.

 

특히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운운하는 이야기는 우스갯소리로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소담(笑談) 속에는 '인천' 지명이 들기도 했다.

 

민병욱의 글에 좀 더 살을 붙이자면 "마담~,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는 실제는 ", 마담, 홍콩에서 '라이터 돌'을 실은 배가 인천항에 들어오면 말이야"라고는 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무렵에 이르러 성냥 대신에 1회용 가스라이터 사용이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통칭 '라이터 기름'이라고 부르는 휘발성 연료를 넣는 '지포 라이터' 종류도 역시 라이터 돌을 필요로 했다.

 

 

은성다방 오소회전.

 

1회용 가스라이터 공장은 인천에 상당히 많았었는데, 그 폭발적인 수요에 따라 '라이터의 불을 발화시키는 돌'의 수입도 늘었기 때문에 이런 코믹한 농담이 다방 마담과 연관되어 퍼져 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년의 느끼한 남성이 약간 코 먹은 목소리로." 하는 것도, 그때 유행하던 대로 말하자면(그 자세한 연유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그냥 단순한 '중년의 남성'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배우 고 허장강(許長江) 씨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제격이었다.

 

'라이터 돌' 이야기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다방 마담을 달래는 의미에서 겉만 사장인 한량이 둘러대는 대사인데, 그만큼 당시 다방이 중장년 남성들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밀착해 있었고, 다방 마담이나 레지 역시 그들 단골들과 매우 친숙한 관계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이 '라이터 돌' 대사 앞에는 "이봐 × 마담, 우리 뽀뽀나 한 번 할까?" 하는 속된 전제가 있었다고도 한다.

 

1970년대에 들면서 인천의 다방들은 전처럼 굳이 문화 예술 분위기를 가지지 않는 추세였다.

 

사회가 다기화 하고 분파해 가면서 다방을 이용하는 손님이 각양각색으로 늘어나는 터에 굳이 예술가들만을 본위로 하거나 우대해서 다방 분위기를 한정(限定)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전시 장소가 늘어난 이유도 있지만 다방들의 이런 영업 방침에 따라 '다방 전시'가 다소 주춤해지는 추세였다.

 

이때까지도 문화 예술인 다방 전통을 고집하고 있던 곳은 '은성다방'이 거의 유일했다.

 

그 외에는 1970년대 중반에는 송현동 오성극장 입구의 '오성다방'과 인천상공회의소 지하 '상지다방'이 그리고 후반 말엽에 생긴 가톨릭회관 지하 '성지다방' 등이 간간히 그림전이나 시화전, 사진전을 여는 정도였다.

 

후일 '은성다방'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는 다방이 신포동 외환은행 옆 '국제다방'인데 증개축 후 옛 멋을 잃은 '은성다방'을 뒤로 한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을 일부 끌어 모은 정도였다.

 

참고로 다음은 1970년대 '은성다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 예술계 전시회 기록이다.

 

 

허욱·김구연·이석인 3인 시화전 팸플릿.

 

<1975> 621-28일 허욱(許旭) 김구연(金丘衍) 이석인(李錫寅) 3인시화전, 1110-16일 한국사진협회 회원전 <1976> 1220-26일 율리문학회(栗里文學會) 시화전 <1977> 128일 연당(然堂) 최경섭(崔璟涉) 시화전, 822-27일 서천(西泉) 랑승만(浪承萬) 시화전, <1979> 610-16일 박병춘, 홍윤표 서양화전 등이 열렸다. 이밖에 197665-11일 인천상공회의소 지하 상지다방에서 택류(澤流) 홍세영(洪世英) 사진전이 개최되었다.

 

1970년대의 또 한 가지 특징이라면 출입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단골다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중구 신생동 옛 공보관 옆의 '소월다방'1970년대 중반 인천예총 회장이었던 이철명(李哲明) 화백이 자주 드나들었다.

 

'소월다방'은 이철명 회장으로부터 공보관 뒤의 나대지(지금은 아마 한일기업의 부지가 되었을 것이다)나 다름없던 몇 평의 땅과 퇴락한 건물을 매각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브로커를 자원해 한 동안 원매자를 물색한답시고 이 다방을 드나들던 작고한 친구 J를 따라 종종 가 앉곤 하던 다방이다.

 

고 최병구 시인은 '은성다방'을 떠나 한때 신생빌딩 지하의 '신생다방'을 아지트로 삼기도 했고, 신광인쇄소 김정호(金貞鎬) 사장은 사무실과의 거리 형편상 '외교다방'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신포동의 '폭포수다방', '란다방' 등은 수필가 김길봉, 소설가 김창황(金昌璜), 극작가 김진엽(金眞燁) 선생들이 자주 가던 다방이다.

 

작고한 분들이지만 다방에서 한가하게 신문을 보거나 아니면 원고를 쓰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국제다방'1980년대에 이르도록 이분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그래도 정리(情理) 상 괄시할 수 없는 단골손님만은 의리를 지켜 가끔 찾아가야 하니 이 노력이 여간 힘들지 아니하다. 의리 지킬 집이 한두 집이 아니니까 이 집에 가면 저 집이 걸리고 저 집에 가면 또 그 집 생각이 나서 심중불안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커피를 좋아한다기로 집집마다 모조리 다니며 커피만 마실 수는 없으니까 다른 것을 섞어 마시게 되는데 다방은 커피가 생명인지라 이것이 문제이다.

 

", 난 커피 그만두고 레몬티를 다우."

 

슬그머니 말했건만 눈치 빠른 마담은 벌써 알아듣고,

", 그러시겠죠. 딴 데서 잡수시고 오셨으니 우리 집 커피를 어떻게 잡수시겠어요. 레몬티인들 선생같이 입 높으신 분 입에 대실 수 있나요, . 사과나 잡수시죠. 사과만은 저의 집 가공품이 아니고 천연산품이니까 안심하시고 잡수세요. 가시다가 ××다방에 들르셔서 또 한잔 잡수셔야지 않아요."

폐부를 찌르듯이 내 심리를 알아맞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못 이기는 체 3백 원짜리 사과를 깎으면서,

 

"내가 언제 ××다방 갔다고 그렇게 비꼬세요. 나는 찻집이라고는 이 댁밖에 모르는데요. 요새 위가 상해서 커피를 못 먹어요. 공연히 오해하지 마시우."

하고 변명해 보나 안 될 말이다.

 

김성진(金晟鎭) 전 보건사회부장관이 쓴 수필 다방의리(茶房義理)의 일부분이다.

 

이 수필은 1950년에 쓰인 것이지만, 1970년대 무렵에도 흔히 보이던 풍경이었다.

 

다른 다방에 갔던 사실을 들킨 손님이 오히려 단골 다방 마담에게 쩔쩔매는 장면이 재미있다.

 

종일토록 6잔의 커피를 마셔 구토가 나는 지경에서도 의리를 지킨답시고 단골다방을 찾아가 또 차를 마시는 고역을 한탄하면서도 "커피는 역시 다방 분위기 속에서 주인 마담과 농담을 하며 마셔야 기분"이 난다는 끝 부분의 고백에 실소와 함께 공감이 간다.

 

다방마다 단골이 정해져 그 다방만을 다니는 '다방의리'가 널리 통하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다음은 1970년대 초반 133개 인천의 전체 다방 전화번호이다.

 

당시 어느 다방 카운터에 걸려 있던 '다방조견표'에 실린 것으로 주소는 아쉽게도 기재가 되어 있지 않다.

 

단골 다방의 추억이나 김 장관처럼 각별한 '다방 의리'가 있었던 분들은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다.

 

 

/김윤식(시인)

 

'다방조견표'에 실린 전화번호

 

4826 경기2743 경인0558 고고5670 고려8191 9275 2332 궁원2218 귀거래2210 귀빈3071 2929 금강2332 금성3309 금호6377 7688 나이야가라3239 낙원6578 낙희4837 남산2097 노엘4953 늘봄5374 뉴서울32393968 대도3054 대림1016 대성3546 대지3134 대한1981 대호2515 대화3181 도원4450 9241 돌체2620 동백1460 동양2753 동원8361 동인4258 동인천0429 동춘1881 동현4704 두꺼비6143 로젠켈라9494 로타리3842 마음1286 만석3451 4314 명성2728 명신9113 명지6042 0409 미담4080 미미7792 미정0774 미화87500285 물망초1344 방원4212 배다리4483 백구0958 백마4751 백호1095 3630 벤허1596 4265 별궁3807 보리수29779360복지8049 복천3254 본궁9585 본전8905 7705 부론즈0658 부성0486 사랑방5794 사장실4965 산유화2059 산호0217 삼성7400 삼화4738 상로6757 상록수4356 상미7848 상아탑2341 샨데리6431 6379 서림5747 1349 선미3325 설매3168 0454 성림5775 성진6558 세계1728 쎄븐1108 소원6741 소월5423 2950 송림0484 송미9008 송월8518 송지1279 3100 수도3724 수련9726 수정5867 수정탑5900 수향6713 숭의0161 신생4657 신세계2955 신신8137 신신커피3109 신정3846 신진4269 신혼1524 신흥3924 아담2770 아씨1435 아카데미2623 아테네8544 알파4702 야호1675 3362 양지1670 양호3085 엄지3848 에덴2173 여로9717 여심9767 여왕봉4019 여정1320 역마차4151 1015 영화6221 오성3422 왕궁8914 외교1636 외환3451 0272 용현9419 우봉0881 우정1700 우성9976 8981 월궁5900 월드컵5280 유니버샬7210 유림5818 유성5518 유토피아6800 8462 은성4038 은실5749 은파9992 은하2417 은하수0367 은호0602 응접실2560 인성4887 인천0559 인하3602 일번지1221 자유1483 장미2485 장안5244 전원3622 0552 정심2979 정은4631 중앙7019 주안1473 지하2058 지하실3688 3950 천수4348 청수3840 청원2308 청포0783 청호1713 초원5842 칠성8423 커피코너5339 코스모스9374 코끼리4953 타임4463 태양3522 통일3478 투모루2681 티파니8750 파고다4155 평화4690 폭포수3158 2947 한림1133 한일5685 한진8908 해남2883 해안1132 향미6167 향촌3107 현대3100 혜원3354 0181 호반2527 호산나0106 호성8290 호수4157 호전2031 호정8858 화백0224 화성6776 화수7140 화신2101 황금2084 흑백0433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