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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3.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 1980년대'국제다방'의 기억

by 형과니 2023. 6. 24.

23.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 1980년대'국제다방'의 기억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2:12:24

 

그리운 인천 문화인 안식처

추억 속으로 쓸쓸한 퇴장

 

 

1980년대 대표적인 문화예술인 다방이었던 국제다방의 내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 비어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사진제공=김효선(프리랜서 작가)

 

 

화가·서예가들은 물론 사진작가와 언론인 등 지식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국제다방(현 국제커피숍·답동사거리 국제빌딩)1979년 다방문화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에 문을 열었다.

인천 지역에 있는 현존 다방으로서는 유일하게 원래 위치를 지키고 간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제다방 터줏대감인 윤석례 사장은 다방을 처음 차릴 때만 해도 "스스로 꼼꼼하고 도도하게 행동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당시 국제다방을 드나들던 인물들이 소위 지역에서 '콧방귀 한 번은 뀐다'는 유명 인사였던 것.

 

고위직 공무원은 물론 문화예술인과 언론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단골집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에 동참하기 위해선 그도 여러모로 학식과 지성을 겸비해야 했다.

 

그런 윤 사장에게는 현재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손님이 제법 많은 편이다.

하루에 보통 20명 정도는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데, 멀리 부산과 광주는 물론 외국에서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그를 찾는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도 최근 들어 가슴 저미는 일이 부쩍 늘었다.

30년 넘게 함께 해 준 단골손님들이 지병과 노환으로 하나 둘 먼저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

그는 "지난 연말 우리 가게서 송년파티를 한 단골 한 분도 얼마 전 돌아가셨다""보고 싶은 분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야 하니 그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천 신포동 국제다방의 입구.

 

지난 127일자 K일보에 실린 이재훈 기자의 <잊혀져가는 옛 것과의 재회> 6회분 '옛날식 다방'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번 원고가 1980년대 마지막 인천 문화 예술인들의 안식처였던 '국제다방'을 쓸 차례인데 왜 그런지 도통 붓이 나가지 않아 근래에 몇 번 가 앉아 윤 사장과 몇 마디 옛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돌아오고, 돌아오고 하던 차에 공교롭게도 이 기자가 먼저 쓴 이런 '쓸쓸한' 글을 읽게 된 것이다.

 

'국제다방'1980년대 초중반까지 문화예술계 여러 선배, 어른들과 다니던 다방이어서 가지가지 추억이 '은성다방' 이상으로 가슴을 저리게 하는 곳이어서 이 기사를 읽으면서 왈칵 눈물이 다 솟았다.

 

그러면서 이제 여기를 찾는 인천의 문화 예술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적막감이 몸을 옥죄었다.

 

"이제 이 다방을 찾는 인천의 문화 예술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중구 신포동 18번지 외환은행과 잇닿은 국제빌딩 반 지하 '국제다방'은 말 그대로 '은성다방'을 이은 후기 '지식인들의 쉼터'였다.

 

이 글의 두어 회 전쯤에서인가 몇 줄 언급한 바 있지만 '은성다방'의 증개축과 변화를 지겨워한 몇몇 예술인들이 발길을 돌리고, 그 중 몇 분이 여기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잠시나마 문화 예술인 다방으로서 은성기(殷盛期)를 누렸던 것이다.

 

이 다방에 대해 떠오르는 사건이라면 1985년 인천예총 회장 선거이다.

 

당시 평론가 김양수 선생을 후보로 밀던 이쪽 진영이 연락처로 썼는데 손설향 선생, 김구연 형, 조우성, 정승열 양 군 등과 여기서 몇 번의 회합을 가졌었다.

 

그러나 상대 진영의 융성함에 기가 질려 이렇다 할 운동을 펴 보지도 못한 채 패배를 안았다.

 

이 선거는 결국 한상억, 김길봉, 김진엽, 심창화 선생 등 노장층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몇몇 다른 협회를 완벽하게 포섭한, 같은 문협 소속의 소설가 김창황 선생이 재차 회장에 당선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때 번화했던 신포다방 주변의 거리 풍경. 이제는 행인의 왕래도 뜸한 모습이다.

 

그때 연임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던 김창황 선생은 외환은행 앞 '폭포수다방'(지금 파리 바케트 이층)에 선거본부를 차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모퉁이를 돌아 대로변의 '란다방'이 선거 보조 사무실로 쓰였을 것이다.

 

어떤 연유였는지, 분명 변심은 아니었는데, 하루는 시인 손설향 선생을 따라 '폭포수다방'에 가서 김창황 선생 대신 김길봉 선생의 유세(誘說)를 몇 마디 듣고는 커피에 이어 내온 쌍화차까지 연거푸 두 잔을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예총 선거는 각 협회 선거인단(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였는데, 그 시점에는 아직 선거인단이 선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어떤 가능성을 보고 그런 융숭한 대접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그러나 선거인단에는 끼지 못했고 김창황 선생은 무난히 당선되었다.

 

'국제다방'은 예총 선거보다도 그 훨씬 전인 1980, 다시 낭인 생활이 시작되면서 드나들게 되었다.동양화가 우문국 선생과 서예가이면서 광성고 한문 교사 김인홍 선생, 서양화가이자 광성고 미술선생 정순일(鄭淳一) 화백, 미술학원과 타계 얼마 전 선화여중 미술 교사를 지낸 김영일 선배, 미술인은 아니었지만 정순일 화백의 백씨로 무슨 조경회사에 관련하던 정순창 선생, 그리고 영종도 동사무소였는지 보건소였는지 아무튼 공무원이었던 K양과 송림동 거주 '영순' 양 등이 우리 멤버였다.

 

차를 마시고 긴한 대화를 하기 위해 모였다기보다는 그저 한 사람 두 사람 자석에 끌리듯 차례로 신포동에 출근해서는 이 일대 교통 요지에 앉은 '국제다방'을 모항(母港)으로 삼아 근처를 무위(無爲) 항해했다는 것이 옳을 듯하다.

 

물론 낮부터 국제에 모이는 멤버는 당시 교사였던 김인홍 선생과 정순일 화백, 그리고 그의 백씨 정순창 선생, 공무원 K양을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이었는데, 저녁이 되면 이들까지 '국제다방'이나 '백항아리집'으로 와서 한 식구처럼 동석했다.

 

초저녁 시간에는 가끔 화가 황병식(黃秉植) 선생, 독특한 화풍으로 감탄을 자아낸 백낙종(白樂鍾) 선생도 뵐 수 있었고, 드물게 화가 김영애(金英愛) 씨도 얼굴을 내밀었다.

 

신포동 해장국집의 대명사였던 답동관 집 장녀 소담(素潭) 유성화 씨, 보세 옷가게를 하다 후일 맥주집 '꿈과 같이'를 경영했던 김성실 씨도 드문드문 끼었다.

 

간혹 일요일 같은 때는 전원이 낮 시간에 '국제다방'에 모이기도 했는데, 1982년인가, 이것이 발전하여 이른바 '문화예술인친목동호회'랄 수 있는 '삼락회(三樂會)'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 명칭에 대해서는 매우 감회가 깊지만 약간의 이설(異說)이 있어 설명은 피한다. 삼락회 결성의 뒷일은 지금 인천예총 사무를 보는 김학균이 물심양면 매우 헌신적으로 감당했다. 그의 직장이 '국제다방' 바로 옆인 외환은행이어서 가장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그 한 이유였다.

 

삼락회 초기 멤버들로 장주봉 화백의 고향 충남 아산의 도고온천으로 첫 번이자 마지막 기념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우문국, 김인홍, 심창화, 손설향, 이종무(李種茂), 김영일, 김학균, 장주봉(張柱鳳), 김윤식, 김영애 그리고 이종무 화백의 '한 동행자' 등이었는데, 몹시도 추웠던 그해 겨울날 하루 일정은 꽁꽁 얼어붙은 무슨 저수지에서 태공들의 얼음낚시 구경을 하고는 점심을 먹고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김학균이 준비한 봉고차를 타고 떠난 장소도 물론 '국제다방' 앞이었다.

 

 

'국제다방'의 추억이라면 또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인터넷 어느 블로그에도 얼핏 그런 말이 올라 있었던 듯한데 이른바 '주사 맞는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아마 영원한 '우탄트 총장' 우문국 선생이 지어 냈거나, 아니면 널리 유포시킨 주인공일 것이다.

 

'국제다방'에 모이면 우선 커피 한 잔씩을 한 후 '백항아리집'으로 가서 약주를 몇 양재기씩 들이키는 것이 통례였다. 그리고는 다시 제집 찾아오듯 '국제다방'으로 돌아와 한담과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때는 차를 주문하지 않아도 윤 사장이 너그럽게 보아 주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면 문득 우 선생이 김인홍 선생이나 고촌 김영일 선배를 넘겨다보며 넌지시 "벌써 약발이 다 떨어졌어요. , 주사 한 대 맞으러 갑시다." 하는 것이다.

 

'주사 맞는다'는 말은 곧 '약주를 한잔 마신다'는 암호로 이것이 바로 활력을 주는 '캄플주사'의 뜻이었다.

 

이 말을 알아듣고는 좌중은 이내 웃음으로 답하거나 ", 좋지요. 링게루 맞으러 갑시다!"로 화창하는 것이다.이제부터 술집과 다방의 왕복 항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즉 모항인 '국제다방'을 중심으로 '백항아리' 혹은 '미미집' 혹은 '신포주점' 그도 아니면 '마냥집' 등을 번갈아 드나드는 것이다.이렇게 다방과 술집을 들락날락하는 그 모습이 마치 작은 배들이 쉼 없이 들고나는 풍경과 진배없었다.

 

'국제다방'은 애초 경기매일신문사 인쇄 제작 시설이 있던 구조였던 데다가 그때는 시내에 전문 전시 시설도 몇 군데 생겨났기 때문에 '은성다방'처럼 자주 전시회가 열리지는 않았다.그러나 작가들이 희사한 그림과 서예 작품은 오히려 여러 점이 벽에 걸려 있었다.

 

1983<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을 때, 문협 지부장이던 이정태(李鼎泰) 선생이 추천기념패를 만들어 여기서 전해 주고는 프린스호텔 노래방으로 가서 흥겹게 노래 부르고 놀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한때는 이 다방에 한상억, 김길봉 선생이 자주 자리를 했었고, 간혹 사진작가 김용수 선생, 국악협회장을 지낸 김유현 선생 모습도 보였다.

 

'국제다방'을 출입하던 한 세대 전 선배 예술인들은 지금은 대부분 작고하셨다.

 

생각하면 1980년대 초 3~4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국제다방'은 아직도 문을 열고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제 종말에 닥친 늙은 짐승처럼 아주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형국이다.

 

이 무렵에 신축된 정우금고 빌딩 지하의 '정우다방'에서도 간간이 전시회가 열렸다.

 

고 최병구 선생이 길을 터놓은 '오성다방'에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시화전이 열렸다.

 

신흥로터리 '대원다방'은 수많은 '다방 사장'들과 함께 여전히 번성했고, 상공회의소 직원들이 많이 찾던 신포동의 '곰다방'과 사동 인천상공회의소 지하의 '상지다방' 등도 이 바닥 터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손님들을 맞았다.

 

이들 다방들은 미구에 닥칠 시련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늘 분주하기만 했다.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하나였던 신포동의 유명 음식점 '미락' 골목에 있던 '신포다방'은 후배 부인이 경영했었는데 다방의 본 이름보다는 '신포일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했다.

 

1980년대 인천 시정(市井)의 모든 뉴스거리들이 매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실제 지역 신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되었던 까닭에 붙은 별명이었다.

 

시정 방침, 검경(檢警) 소식, 항만 소식, 시장(市場) 사항, 공무원 동향, 학계, 문화예술계 각종 뉴스는 물론 인사 문제, 지역 유지 동정 등을 망라한 모든 뉴스가 이곳에서 파급되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단 이 '신포다방'뿐만이 아니라 인근에 소재한 몇 개 다방들을 통해서도 소식과 소문은 시내로 퍼져나가 신포동의 다방들이야말로 소문을 생산하고 확대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퍼트리는 광장 같은 장소였음을 입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고 1990년대를 겪으면서 오늘날 대부분 문을 닫고 종적도 없이 사라져 거리마저 쇠락한 채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 갈 뿐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