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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5. 에필로그 - 스타벅스의 등장과 추억으로 남은 다방<끝>

by 형과니 2023. 6. 25.

25. 에필로그 - 스타벅스의 등장과 추억으로 남은 다방<>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2:27:48

 

그 많던 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25. 에필로그 - 스타벅스의 등장과 추억으로 남은 다방<>

 

 

1999년 한국 최초의 스타벅스 매장인 이화여대 1호점 오픈 기념식.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 입구에 초기 동호인들의 문화애호가적인 분위기의 다방 '카카듀'를 처음 개업한 이래 1929'멕시코다방'에 이어 1930년대에는 '낙랑파라'가 등장한다.

 

시인 이상(李箱)이 시공하거나 개업한 다방 '식스나인(6·9)' '제비' '쓰루[]', '무기()' 등이 모던(Modern)의 상징으로 문화 예술인들과 '모뽀모껄'의 아지트로서 우리나라 특유의 다방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다.

 

이어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는 모든 국민이 다 다방 문화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는 이른바 다방의 최전성기를 맞는다.

 

 

세월에 밀려 인적이 뜸해진 다방의 입구./사진제공=김효선(프리랜서 사진작가)

 

 

한 집 걸러 다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방의 수적 팽창과 함께 다방은 도시민 생활의 일부분처럼 밀착된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지구상에 오직 한국에만 있는 이 독특한 형태의 다방이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특히 한국인들이 드나드는 다방에 대해 그들 서양인들은 불가사의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1960년대 말, 미국 공보처(U.S. Information Agency)가 우리나라 다방의 속성을 속속들이 파헤친 보고서를 내기에까지 이른다.

 

그것이 부산의 다방들을 샘플로 해서 만든 <다방 한국의 사교장(Tea Rooms and Communication in Korea)>이라는 제목의 12장짜리 조사 보고서였다.

 

1970년대는 "커피는 역시 다방 분위기 속에서 주인 마담과 농담을 하며 마셔야 기분"이 난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사람의 애호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다방사의 최절정기, 다방 문화의 난숙기라고 부를 만큼 성업(盛業)을 이룬다.

 

또 이 시기는 1960년대에 이미 생겨나기 시작했던 이른바 '다방 회사, 다방 사장'이 범람한다. '다방 사장'과 다방 마담, 레지의 긴밀한 관계는 역시 한국 다방 문화의 또 다른 한 특색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에는 문화 예술인 다방과 일반 시민 다방이라는 두 가지 확연한 구별이 생긴다.

 

전문 '음악다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960년대부터 이미 몇몇 다방들은 DJ를 두는 새로운 영업 형태를 선보였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는 유명 DJ를 둔 대규모 전문 음악다방들로 변모해 젊은 층을 상대로 번창한다. 이때 등장한 인스턴트커피는 새로운 커피 시대를 열면서 전통 다방들로 하여금 과거식 다방 경영 개념에서의 탈피를 더욱 강요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우리 사회의 빠른 변화와 함께 다방 경영의 환경도 크게 달라진다. 다방이 몰락할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시민 생활 패턴, 취미, 오락 문화가 바뀌면서 전통 스타일 다방은 차츰 외면 받기 시작한다. 더구나 도시, 농촌 구별 없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포화 상태에 이른 다방들은 상호간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스스로 변화를 꾀하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던 다방 형태들이 음악다방, 여성 전용 다방, 심야다방, 화랑다방 등이다. 이렇게 변전, 분화한 다방들은 대부분 젊은 소비층을 상대로 한 업소였다. 아직 변화하지 않은, 중년 이상 노년층이 출입하는 전통 형태의 다방들, 속칭 '노땅다방'들은 그대로 건재하면서 젊은 층들의 다방과 양립한다.

 

또 일부 '노땅다방'들은 경영 압박을 견디지 못해 폐업하거나 도시 변두리, 혹은 멀리 농촌지역으로 밀리면서 탈법, 혹은 불법 음란 티켓다방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세간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2000년대까지도 영업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1990년대는, 다방의 입장에서는 더욱 비관적인 시기였다. 88올림픽 이후 세계화 추세에 맞춰 다방보다 진보한 공간인 카페, 레스토랑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생 카페, 레스토랑들은 전통 스타일의 다방들을 차츰차츰 구축(驅逐)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방을 밀어낸 카페의 전성시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 채 단명하고 만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국적 기업을 필두로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막강한 자본력과 첨단 경영 시스템으로 공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일어난 IMF도 다방에게는 치명타였다.

 

그 실례의 하나가 20021226일자 주간조선에 실린 이거산의 <스타벅스에 도전장 낸 자바시티>에 실려 있는 기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IMF , 국내 다방 수가 대략 3만 개 업소에서 IMF를 맞으면서 9천 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제 위기에 견디지 못하고 다방들이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고 만 것이다. 이때 폐업한 다방들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농촌지역으로 파고들어 티켓다방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지방 중소도시나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티켓다방 사건, 사고 기사가 1980년대보다도 더 빈번했었다. 이밖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남자 종업원을 고용해 여성 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역() 티켓다방이 생겨 일부 중소도시로 퍼져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IMF 위기를 극복하면서는 종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문을 연다. 그리고 '스타벅스'2000년대 한국 원두커피 판매의 선두주자로 떠오른다. 에스프레소 커피가 한국인의 취향에 들어맞았는지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테이크아웃 문화를 유행시킨다.

 

2000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기간은 '스타벅스'를 비롯해 '커피빈' '투썸플레이스' '엔제리너스' '할리스' '파스쿠찌' '카페베네' 등 주요 전문 커피 브랜드가 종래의 다방 대신 한국인의 입에 원두커피를 공급한다.

 

"빵집이 동네마다 들어선 것처럼 커피 시장도 비슷하게 커질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원두커피가 하루 평균 3700만 잔 분량으로 조사됐다.식품의약품안전청이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의 커피 수입량을 분석한 결과 200179526톤에서 지난해 123029톤으로 1.6배로 늘었다.

 

금액으로는 8000만 달러에서 66800만 달러로 8배로 증가했다.수입된 커피의 88%는 원두 형태이며 볶은 커피와 인스턴트커피 등 가공커피는 12%였다. 원두 수입량은 200176757톤에서 지난해 108918톤으로 1.4배로, 금액 기준으로는 6200만 달러에서 41200만 달러로 6.7배로 늘었다.

 

지난해 한국인이 마신 커피는 하루 평균 300톤으로 에스프레소 3700만 잔과 비슷하다. 이는 국내 경제 활동 인구가 하루에 커피 한 잔 반을 마시는 양이라고 식약청은 설명했다." '한국 커피공화국하루 3700만 잔 마셔'라는 제하의 지난 317일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커피 수입량이 10년 새 1.6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 다방이 그토록 번창하게 늘어나더니, 오늘날에는 커피 전문점이 성황기를 맞은 셈이다.한국인의 입과 커피는 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커피는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에 입항한 외국 상사(商社), 외교 사절, 종교인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이다.아펜젤러의 일기를 통해 '인천항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에서 커피를 제공하거나 판매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근대적 다방으로 인천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 '파로마다방'을 시발로 1950년대 '등대다방', 1960년대 이후 '은성다방' 등이 문화 예술인, 기자들을 고객으로 하면서 인천의 다방 명성을 잇는다. 이후 인천의 다방들도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면서 세태의 변화를 겪게 되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회생 불능의 쇠락의 길을 걷는다.

 

"경기북부의 군부대 밀집지역에는 외출 외박을 나온 군인들을 상대하는 다방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 다방들은 티켓다방이라기보다는 카페의 낙후된 형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군부대를 살펴보면 다방 레지와 연애를 하는 병장 한둘쯤은 있다.<중략>

 

서울에도 변두리 지역에는 다방이 몇 군데 남아 있다. 97%는 지하에 위치하고 있고, 가끔 건물 2층에 있는 곳도 눈에 띄지만, 일반 커피숍과 같이 1층에 있는 경우는 전혀 없다.

 

간판에 커피숍이라 씌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딱 보면 다방임을 알 수 있는 디자인이다.<중략> 요새는 일손이 부족해서 오너 혼자서 마담 겸 레지 노릇을 도맡는 경우도 꽤 있는 듯하다. 농담 삼아 어항이 있으면 다방, 어항이 없으면 카페라고 한다."

 

이 인터넷에 떠 있는 글은 오늘날 남아 있는 다방의 현실을 아주 재미있고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숫자로써 단정을 내리는 것이 오히려 신빙성을 훼손하는 감이 있지만, '변두리 지역에 남은 몇 군데 되지 않는 다방들의 97%가 지하에 위치한다.'는 말이 상당한 공감을 부른다. 참으로 세밀한 관찰이다.

 

옛 스타일의 다방들 대부분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지하로 내려앉고 만 것이다. '간판에 커피숍이라고 씌어 있다 해도 그 디자인으로 그것이 다방인지 진짜 커피숍인지 구별이 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시 재미있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한편 무언지 모를 처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가슴에 자리잡는다.

 

"다방에는 첫사랑에 몸을 떠는 자, 즐거운 자, 피곤한 자, 실연한 자, 아파하는 자, 속이려는 자, 속는 자, 고뇌하는 자, 또 지식이 있거나, 예술을 하거나, 지위가 낮거나, 부자이거나, 노인이거나, 대학생이거나, 어느 누구도 구속 받음이 없이 와 앉을 수 있었고, 마음 졸이며 기다릴 수 있었고, 웃을 수 있었고, 속삭일 수 있었고, 쉴 수 있었고, 식은 찻잔을 앞에 놓고 이별할 수 있었다. 해서, 다방은 그 공간에 드나들던 그때 사람들의 가슴 속에 인생의 한 간이역으로, 교차로로 두고두고 살아남아 있지 않을까."

 

이들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멀리 떠났는가.

여기 드나들던 사람들은 또 다들 어디 갔는가.

이제 남은 몇몇은 이렇게 도시 뒷골목, 변두리에서, 끝내 늙은 짐승처럼 처량한 몰골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인가.

이 나라 다방 80여 년 그 명맥이 이렇게 속절없이 사그라져 가는가.

이것이 무상이고 시간 속에 변전하는 만사이며 인생인가.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