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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4.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 마지막 전통 다방시대

by 형과니 2023. 6. 24.

24.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 마지막 전통 다방시대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2:23:19

 

사람들 낭만 담았던 자리 새로운 커피문화 시작

24.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 마지막 전통 다방시대

 

 

다방 주방 풍경. 뜨거운 물에 커피잔을 데우고 있다./사진제공=김효선(프리랜서 사진작가)

 

 

1970년대 다방의 난숙기를 지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마 다방의 분화시대(分化時代)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아직까지 시내 모든 다방들이 뚜렷하게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는 않지만 몇 가지 형태로 생존을 위한 변신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해서 등장한 음악다방들도 시들해지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새롭게 카페가 문을 열고, 또 커피숍이 등장하고, 통금 해제와 더불어 야간까지 영업을 하는 심야 다방도 출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로 빠르게 발전해 가면서 생긴 생활 패턴, 취미, 오락 문화의 변화 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전통 스타일 다방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 포화 상태라고 할 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난 다방들 자체가 피차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변화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차 값의 자율화와 함께 차 종류가 다양해지고 값도 비싸졌으며 분위기 좋은 실내 장식을 갖춘 다방이 많이 등장하였다.

 

'난다랑(蘭茶廊)'을 필두로 체인점을 갖춘 다방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랑'이라는 상호명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야간 통행금지제도가 폐지되자 심야다방이 대도시에 많이 나타났다. <중략>

다방 업이 번성하여 늘어나게 되자 지역별·연령별 전문화 추세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여성 전용 다방까지 등장하였고, 청소년의 다방 출입과 비행·탈선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인용한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용의 일부인데 주변 여건 변화에 따른 1980년대 다방들의 변화 추세를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여파는 인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구 내동 내리교회 입구에 '고전화랑' 같은 화랑다방(畵廊茶房)이 생겨나기도 했으나 그다지 오래 명맥을 이어가지는 못했다.그러나 여성 전용 다방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용 여성 손님 수의 희소(稀少) 같은 지역적 한계 때문에 한 군데도 문을 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서울 같은 곳은 예외로 하더라도 심야다방은 대체로 밤늦게까지 열차나 버스가 도착하는 역과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에 주로 생겨났다.그러나 심야 다방 역시도 인천에는 크게 성업(盛業)을 이루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등장한 커피 자판기도 다방에 대해서는 매우 불리한 뉴스였다. 직장인들은 점심 식사 후 다방에 가지 않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판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해 1985년엔 무려 15만 대에 이르고 88올림픽을 계기로 해서는 아주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레스토랑과 카페의 발전 역시도 다방의 영역을 차츰차츰 축소시키고 있었다. 물론 '커피숍'이라고 부르던 커피 전문점도 다방을 몰아세우는 주요 세력이었다.

 

커피 전문점의 발흥은 강준만·오두진 공저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이 시기에 등장한 원두커피 전문점의 시초는 '쟈뎅'으로 1988년 말에 압구정 1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커피 전문점은 1989년을 시작으로 이후 전국적인 커피 붐이 일어난다.

 

이처럼 1980년대를 다방의 분파, 변화시대이면서 쇠락기라고 말할 수 있는 요인은 '다방들이 종래 전통 형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던 사회 환경의 변화와 다방 상호간의 극심한 경쟁 체제, 그리고 오직 다방에서만 마실 수 있었던 커피가 일반 대중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다.

 

1982년 무렵 동서식품에서 출하한 진공 동결건조 커피인 '맥심''주방장이 없어도 커피 2스푼, 프리마 2스푼, 백설탕 3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벽한 커피가 된다'는 동서식품의 홍보대로 다방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정과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한 것이다.

 

'맥심'은 이제까지 다방에서 쓰이던 원두커피 대신에 인스턴트커피 시대를 개막하는 서장이기도 했다.

 

'미국 맥스웰하우스 커피 본사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 5대 커피 중의 하나인 커피믹스가 우리나라에서 개발되었고, 커피믹스의 황금 배합이라 일컬어지는 인스턴트커피 15%, 커피 크리머 30%, 백설탕 55%의 성분 비율은 이때 생겨 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아무튼 인스턴트커피는 커피 자동판매기의 보급 확대와 함께 '커피믹스', '캔 커피'의 개발로 커피 시장을 넓혀 감으로써 기존 다방의 입지를 더욱 좁힌다.

 

한편 아예 '노땅다방'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 전용'을 표방하는 다방으로의 변신도 있었다.

 

19887월 창간호 <월간다방>에 실린 어느 다방 여자 종업원의 수필 내용 중에 노인 전용 다방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정황과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한때는 젊은 시절을 지냈을 이분들, 사람과 자동차와 회색빛 암울한 빌딩밖에는 눈에 띄지 않는 이곳 도심에서 이들은 정말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친구 분들과 혹은 혼자서 오후의 한때를 이곳에서 보내는 분들이 꽤 많다.

 

여기서도 그분들의 외로운 황혼의 시간을 넉넉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이분들이 이곳에서 조금의 휴식을 취하기에 마음이 편한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 같은 '노땅다방'의 등장과 함께 퇴폐로 치달아 티켓다방이라는 형태로의 변질도 이루어졌다. 도시 변두리 다방이나 중소도시, , 면소재지 다방들은 생존 전략으로 상당수가 이런 불법 음란 영업을 했다.

 

경북 영주시(榮州市)와 영풍군(榮豊郡) 내엔 요즘 손님들이 요구하면 다방 여종업원을 여관 등지에 보내는 이른바 티켓업이 성행.

 

영주시내 87개 다방과 영풍군내 20개 다방들은 요즘 여종업원 3~5명씩을 두고 손님들이 여관이나 사무실 등에서 전화로 차를 주문하면 여종업원에게 차 배달을 시키면서 티켓을 끊어주고 손님들과 함께 즐기게 하는 대신 1시간 당 5천 원씩을 여종업원들로부터 받고 있다는 것.

 

여종업원들은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는 등 유흥을 즐긴 후 1시간당 1만 원을 요구, 그 중 5천 원을 다방 주인에게 주고 있다.

 

198554일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인데, 작은 도시 영주시와 영풍군에 다방이 무려 87개소와 20개소라는 숫자 자체도 놀랍지만 이런 시골에서 이와 같은 퇴폐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해에 서울에서도 퇴폐 업소 단속이 있었다는 기사를 볼 때, 이 같은 퇴폐다방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이 무렵 인천은 대구시처럼 노인 전용을 표방한 다방이 생겨나지는 않았지만, 자연적으로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다방과 장년 이상 노인들이 출입하는 다방으로 2분되어지기는 했다. 다행이랄까, 티켓다방에 관한 불미한 소문 역시도 인천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농촌지역에까지 다방이 급증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던 다방들은 분파와 힘겨운 변모를 겪으면서 1990년대를 향한다.

 

그러나 19891028일자 한겨레신문은 이런 와중에도 낭만적인 기사로 1980년대를 마감한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시중의 다방이나 카페, 유흥업소 등에서 가장 많이 불렀거나 시청되는 가요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외국 팝송은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DJ연합회가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5백 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장 애청하는, 또는 신청하는 국내가요 베스트5 2위는 김민기의 '친구', 3위 송창식의 '고래사냥', 4위 양희은의 '아침이슬', 5위 패티 김의 '초우' 등이고 외국 가요는 닐 세다카의 '유 민 에브리 싱 투 미' 2, 사이먼과 가펑클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3, 비지스의 '돈 포겟 투 리멤버'4, 레드 제플린 '스테어웨이 투 헤븐'5위를 차지했다.

 

문득 이 무렵에 팝 DJ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김광한이 지금 인천교통방송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1980년대까지는 그렇게 버텨냈는데 1990년대 문화적 기호의 폭발로 다방보다 더 우월한 공간의 등장으로 다방은 우울해졌다.

 

이른바 카페의 등장이었다.

크림과 설탕, 커피라는 단순 다방 커피 메뉴에서 카페는 훨씬 다양한 커피와 음료를 구비했고 젊은 층들의 구미에 맞는 실내 디자인과 함께 음악도 트렌드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냈다.

다방에는 낡은 기운의 뽕짝이나 철지난 팝송만 있었다.

 

젊은 층들의 자유로운 문화적 기호와 취향을 즉각적으로 반영한 카페에 밀려 다방은 퇴락했다.

중소도시나 농촌지역의 매매춘 업소라는 이미지에 묻혔다.

 

다방을 밀어낸 카페의 전성시대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국적 기업을 필두로 한 프랜차이즈커피전문점이 막강한 자본력과 시스템으로 공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글 '어젯밤도 당신은 별다방 콩다방에 있었나'의 부분이다.

 

1990년대 점차 몰락의 위기에 다가서는 다방들에 대해 "낡은 기운의 뽕짝이나 철지난 팝송만 있었다. 젊은 층들의 자유로운 문화적 기호와 취향을 즉각적으로 반영한 카페에 밀려 다방은 퇴락했다"는 말로 그 쇠락을 확인한다.

 

앞으로 도심에서 코피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을 갖기도 그리 쉽지 않을 성싶다.

시민들의 애환이 담기고 사랑의 장소인 '고전적 다방'이 점차 없어져 가는 대신 그 자리엔 신종 카페나 레스토랑 국산 찻집 다실 등이 들어서 있다.

 

'1년 새 서울에서만 다방이 1천여 곳 줄었다'는 내용과 함께 1990610일자 매일경제신문이 전하는 이 비관적이고도 씁쓸한 기사는 당시 다방들이 처한 상황을 '인건비, 임대료 상승과 카페 레스토랑 같은 고급 대체 공간 등장, 자판기 번창, 커피가 건강에 유해하다는 인식' 등으로 분석한다.

 

전국 다방 수는 199342582개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이후 조금씩 줄어들어 1996년 말 현재 41008개소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다방은 광복 이전의 다방 경영이나 분위기·이용 형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의 인용문이다.

 

이 무렵이면 인천 다방의 중심지였던 신포동, 인현, 내동 그리고 중앙동 관동 지역에도 점차 다방들이 전업을 하거나 문을 닫기 시작한다.

 

반세기 이상 우리를 맞아 기쁨과 근심, 회한과 환희 아픔과 희망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던 정겨운 '전통 다방 시대'는 이렇게 빠르게, 필연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