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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고일 선생-지역대표 언론인

by 형과니 2023. 4. 1.

고일 선생-지역대표 언론인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45:00

 

[인천인물 100]고일 선생-지역대표 언론인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는 고일(高逸·1903~1975) 선생은 인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19544월 인천지역의 대중지였던 '주간인천''인천석금(仁川昔今=인천의 어제와 오늘)'이란 제목으로 개항초기부터 50년대 초까지의 인천의 사회상을 1년여간 연재한 글에서 나는 인천의 아들, 인천은 나를 키우고 나에게 희망과 야심을 주었으며 또 가난과 버림까지 주었다며 인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인천석금'은 인천 근현대사 100년의 '인천 향토 이야기' 책 가운데 원조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근대에서 현대에 걸쳐 있고, 또한 그 무대가 우리 나라 근대사의 선구지였던 인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과 우리 나라 근대사에 우뚝 서 있는 인천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55년 초판 발행 이후 1979년 후배 성경웅씨가 선민출판사에서 재판본을 찍어냈으나 희귀본이 됐고, 젊은 세대에 낯선 문장을 바꿔 2001년 해반문화사랑회에서 교정본을 발행하는 등 인천의 생활사로서 3판을 찍어낼 정도로 인천한세기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고일이라는 인물이 언론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것은 잘못된 점이 많다. 그는 언론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노동, 문화, 예술, 체육 분야의 수많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운동, 청년운동, 문화·예술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천의 지식층을 이끌던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고일의 본명은 '희선(羲璇)', 호는 '산재(汕哉)'190356일 서울 마포에서 출생해 그해 9월 생후 3개월만에 인천으로 이주해 평생을 인천에서 살았다. 1915(12) 현 창영초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16)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9년 곽상훈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 문예부에서 활동하면서 우현 고유섭, 이길용(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 주인공), 송건우, 임영균 등과 함께 기관지인 '제물포'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곽상훈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을 창단해 이끌면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독자적으로 '신정회(新正會)를 창단하고, 기관지인 '정의(正義)'를 발행했다가 일제로부터 창간호 전부를 압수당하면서 '불온한 청년'으로 일제강점기를 보내게 된다.

 

고일은 1923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촉탁 교원으로 연천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한지 6개월만에 한인 학생들을 도둑으로 몬 일본인 교장의 뺨을 때린 사건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인천으로 돌아와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잠시 생활하던 그는 1924331일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인천석금'에서 이 때를 자신의 전성기라로 회고했다. “소년·청년·노동·사상운동에 선봉이 됐고, 무관의 제왕으로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기개와 의협은 일생을 두고도 기억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유치장 출입은 다반사였고, 치안유지법으로 약 4년간 영어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향토사학자 조우성(57·현 광성고 교사)씨는 일제 강점기 기자와 교사를 지낸 것은 대단한 신분적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며 당시 고일 선생이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신분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고일은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부두를 비롯해 방직공장, 성냥공장, 정미소, 선미공(쌀에서 뉘를 골라내는 직업) 등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관리하는 일본인들의 인권침해가 심각했다. 따라서 근로자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나왔고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사회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던 지식층에선 노동문제가 큰 이슈였다.

 

19254'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보자'는 구호 아래 열린 '전조선기자대회' 이후 신문기자단과 신간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쯤 일이다. 고일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선미여공의 파업기사는 인천 역사 이래 노동자는 물론 남녀노소가 하나로 뭉쳐 일제의 민족차별에 거세게 항의하는 '인천 노동운동의 효시'를 제공하게 된다.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여공을 구타한 데 대한 항의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던 가등정미소를 취재하고 사진을 게재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여러 정미소가 동맹파업을 단행했고 부두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파업에 돌입, 인천 전체가 총파업함으로써 역사적인 민족 투쟁이 전개됐다.

 

하지만 그는 1931년 일어난 '만보산 사건'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통한 재인화교와의 교섭 친화, 신간회운동 등을 통한 민족 단일당 운동 등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327월 북만주로 떠나 6년여 동안 망명생활을 한다.

 

1938년 고일은 일본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6년여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생계난으로 인천부청(현 인천시) 임시사원으로 7년간 일하다 해방을 맞는다.

 

고일은 이 때의 일을 자신의 일생에서 부끄러운 일로 여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주간인천 지면을 통해 요시찰인으로 출입왕래가 부자유, 호신책으로 여러 친지 등의 권유로 인천부촉탁으로 있었다장년기를 무능비굴하게 보냈으니 30년의 시간을 상실했다(주간인천 59629일자)”고 자탄, 일제에 동참했다는 가책을 갖고 살아왔음을 내비쳤다.

 

고일의 인생의 제2의 전환기는 195451세에 '주간인천'의 주필로 재직하면서부터다.

 

고일은 1년간 '지면자(池面者=못난놈)'라는 필명으로 개항초기부터 50년대 초에 이르는 인천의 역사, 문화, 경제, 사회 발전상을 '인천석금'이라는 칼럼으로 연재하면서 호평을 받는다.

 

그는 제2의 언론생활을 하면서 향토를 위해 내가 할일을 하고 죽어야 할 것이라며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각별히 챙겼다. 그는 남은 인생을 인천상고사와 인물사를 구상하다 지나친 음주와 곤궁한 생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동구 화수1동 큰 아들 흥겸(興兼)씨의 집에서 1975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감한다.

 

그가 일생을 마치기 전 '신문기자로서의 길'을 적은 글은 지금도 꼿꼿한 기자정신을 일관하라는 '고언(苦言)'으로 남아 있다.

 

잘 살고 잘 지내려거든 신문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빈한이 도골(到骨)하더라도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의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인물이라면 기자가 되라. 기자의 자랑은 정의의 사도이며, 국민의 벗이며, 시대의 경고자와 역사의 추진자로서 자부하는데 있다. '있는자'의 노예가 될 수 없고, 권력층의 수족이 될 수는 없다. 비굴하지 않고 천만인 앞에 나가서 오직 정의를 높이고 부정을 격멸하고 현실을 폭로하고 선악을 구분비판하여 한 자루의 붓을 무기삼아 사회를 명랑화시키는 데 사력을 다하는 것이 신문기자인 것이다”.

 

 

[인터뷰] 고일선생 손자 고춘씨

 

할아버지는 인천의 운동권 인사들과 시인, 문인 등 청년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죠. 어려운 시대를 사시면서 평생 쌓인 울분을 글과 술로 달래셨습니다.”

 

고일 선생의 손자 고춘(47·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씨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기자' 이상의 '기자'였다.

 

고일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올곧은 소리를 잘했던 비판적 논객활동으로 정권은 물론, 재야인사들 모두 고일 선생의 고언(苦言)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 특히 반정부적 시각으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으로부터 '감시 아닌 감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고씨는 할아버지는 후배 기자들은 물론 청년운동, 문화예술 계통의 후배들 사이에서 큰 형님 노릇을 해왔다어린 시절 대학생들이 데모만하면 으레 경찰들이 고일의 집을 찾아올 정도로 의식있는 지식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 나무의 그늘은 더 깊다'는 말처럼 고일의 후손들은 큰 빛을 받지 못했다.

 

“60~70년대 초까지만해도 연좌제라는 게 있었어요. 할아버지의 경력 때문에 아버지(흥겸씨)는 평생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평생 자전거 멸치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셨어요. 50년이 넘도록 화수동 판잣집을 떠나지 못하셨죠.”

 

고씨는 자신과 형이 군대에 입대할때까지도 이같은 연좌제 분위기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고 했다.

 

고씨는 그러나 반정부적 논조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는 시립도서관장과 문화원장, 인천시사편찬을 맡는 등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그만큼 인천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인정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부임하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면 정치인들이 할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을 정도였다특히 선거때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는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위협적(?)인 말을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는 얘길 들었다고 전했다.

 

고씨는 할아버지는 평생 술로 지내셨으며 말년에는 간경화로 황달을 앓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시고, 인천상고사를 준비하셨을 정도로 열의를 보이셨다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증조할머니·강안나)가 돌아가신지 보름 만에 영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회고했다.

/ 서진호·provi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