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인물

삼연 곽상훈,근·현대정치사 중심

by 형과니 2023. 4. 1.

삼연 곽상훈,·현대정치사 중심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40:26

 

[인천인물 100]삼연 곽상훈,·현대정치사 중심

 

'나는 어둡고 쓰라린 역사의 소용돌이에 던져져 평생을 폭풍 속에 살아왔다'.

 

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말년에 쓴 '삼연회고록'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한말 부산에서 태어나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 경성공업학교를 다니면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청춘을 일제강점기에 울분을 토해내며 보내고 쉰 두살 제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 5선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의회의장과 국회의장, 대통령권한대행을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유족에 대한 연결고리마저 끊겨져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의 가족사에 대해선 몇몇 향토사학자들과 지인들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곽상훈의 둘째 아들인 곽원배씨의 제물포고교(7) 동창생인 황규동 원장(인천시 중구 인현동 황규동치과)의 기억을 빌리면 곽상훈씨가 국회의원을 지낸 동안에는 나이가 어려 접촉할 기회가 없었고, 그의 아들 원배군이 동기생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어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3년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했다.

 

인천 시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김양수(72) 선생은 곽상훈씨의 가족은 60년대 중반쯤 인천 중구 중앙동(현 신포동)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갔으며 천재소리를 들었던 첫째 아들 곽현태씨가 바둑으로 유명했다는 얘기 정도만 들었다고 한다.

 

곽상훈의 일생은 3·1운동, 해방기, 반민특위, 3선개헌파동, 4·19혁명, 5·16군사정변, 유신헌정을 거쳐 제3공화국,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최규하대통령 취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런 역사의 풍랑의 중심에서 벼텨왔던 것은 남다른 그의 성격 때문이다.

 

망국(亡國)의 세월 속에서 그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선 참지 못하고 왜경(倭警)을 때려 경찰서를 제집 들나들듯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성격은 가족사를 보면 이해가 쉽다. 곽상훈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오위장(五衛將)으로 종2품이었고, 증조부는 중군(中軍)의 요직을 지내면서 탐관오리들로부터 무서운 존재로 알려졌다고 한다.

 

김양수 선생은 전해지는 얘기로는 여주군수를 지낸 곽상훈씨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의 아버지가 당시 군청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뜯어다 인천으로 가져와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근업소를 지을 만큼 위세가 컸고, 이런 가족사의 배경이 일제강점기 청년 곽상훈을 일제의 반항아(反抗兒)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던 곽상훈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도전적이었던 그는 '경인기차통핵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과 부산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조종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상훈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인 부산을 찾아 동래읍 장날인 313일 만세운동을 조종한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일본인 수원고농(水原高農) 도미나가 교장선생의 보증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중심으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을 받기도 했다.

 

이 때 고향 선배로부터 받은 아호가 삼연(三然)이다. 삼연은 산자연(山自然), 수자연(水自然), 아자연(我自然)으로 '인생'을 느긋하게 태어난 대로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거칠게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곽상훈은 1920년 신간회(新幹會)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하면서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하는 등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인다. 1925년엔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해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또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한 때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치

 

곽상훈은 해방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한민당의 후보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천지역 청년모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돼 52세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다. 1949'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자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검찰관에 임명돼 친일분자 색출에 나섰다. 1950년 인천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제2대 민의원에 당선돼 전원위원장을 지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서는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제헌 및 2대 의원 때는 원내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내던 19525월 한국전쟁 피난시절 부산에서 계엄령선포에 따른 일명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면서 이승만정권과 극한 대립을 보였다.

 

곽상훈은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4·19혁명으로 자유당국회가 마비되자 개헌국회의 의장으로 보선됐다. 그 해 517일부터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들어선 22일까지 1주일 동안 법에 의해 대통령권한대행의 직무를 맡았다. 이어 그해 7월에 열린 선거에서 5대 민의원에 당선, 민주당에 의한 국회 지배 아래서 제7대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된다.

 

당시 민주당은 윤보선을 지지하는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김도연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을 지지하는 박순천 한근조 등을 중심으로 한 '신파'로 나뉘어 정쟁을 벌였다. 곽상훈은 장면을 지지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장면과 등을 돌리게 된다.

 

1961년 곽상훈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37개국 순방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여행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맞는다.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는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한다. 장면 정권의 2인자였던 곽상훈의 탈당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욱 충격을 준 것은 자신의 손으로 수립한 장면 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국회의장 자격으로 5·16혁명을 적극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면서 박정희정권 지지자로 변신해 야당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는 해산된 국회가 무능·부패하고 정쟁으로 시종했다는 국민적 비판과 역사적 판단을 전적으로 시인한다정계의 추악한 양상은 어떤 비상수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고질화했다고 말함으로써 5·16군사정변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헌법이 정지되었으니 파쟁(派爭)을 종식시키려는 나의 모든 노력과 조정이 실패로 돌아간 그 마당에서 차라리 '쿠데타'라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혁명을 기정사실화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법은 어겼지만 썩은 것을 도려내고 국정을 쇄신해 제발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곽상훈은 이후 박정희최고회의의장을 만나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는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절대 공명선거를 해야하는 것. 부정선거를 하려든다면 스스로가 혁명정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국민을 두번 기만하는 것이 되며 반혁명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 당시만해도 때묻지 않은 사람(군인)들에게 정치를 맡겨보고 싶었던 것 뿐, 정치를 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 곽상훈은 정계에서 일단 은퇴한 뒤 1969년 통일원 고문과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곽상훈은 1972년 유신헌정(維新憲政)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재개, 1979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026일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한 뒤 곽상훈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자격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최규하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치생활을 마감하고, 3개월 뒤인 198019일 서울 우이동 자택에서 75세의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야구인 곽상훈

 

곽상훈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가 어릴적 얼마나 운동을 좋아했는지는 회고록에서 알 수 있다.

 

동래고보를 다닐 때 나는 유독 운동을 좋아했다. 야구, 축구, 정구 가릴 것 없이 노상 운동장에서 살다시피했다. 운동에 열중해 있는 동안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 말썽을 부리는 것 보다는 학교 운동장에서 늦도록 운동에 열중하는 것이 대견스러웠던지 집안에서는 심한 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도 책망하는 일이 없었다.”

 

곽상훈이 우리 나라 최초의 단일 야구팀을 창단하고 각종 청년조직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206월 곽상훈은 자신이 주도하던 친목모임인 '경인기차통학생회'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선수단인 '한용단(漢勇團)'을 창단한다. 한용단에서 나뉘어져 발전한 것이 한용청년회, 제물포청년회, 인천청년회, 인천소년회, 기봉단, 인천보이스카우트 등이다. 이 조직들은 해방 이후 곽상훈을 5선의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용단은 일본인들로 구성된 야구팀인 '미신(米信)'을 비롯해 '()', '조운(朝運)', '경전조(慶田組)', '경전(京電)', '인천철도사무소 기관고(機關庫)' 등의 선수단과 웃터골운동장(현 자유공원 제물포고부지)에서 매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당시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시민들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놓고 웃터골로 모여 응원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주민들은 그때나마 소리를 질러가며 일본에 빼앗긴 한을 풀었다고 한다.

 

당시 야구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은 배재학당에 다니던 최영업, 이수태, 박안득과 중앙고보의 김영길 등이 있었다. 특히 배재학당의 함용화 지의식, 휘문고의 김정식 등은 요즘 얘기로 스카우트를 거친 선수들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인천야구협회가 발족해 인천야구의 정통성과 육성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이후 전국야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밑거름이 됐다.

 

한용단 단장 곽상훈은 한국으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야구단의 책임자로 진두 지휘를 했다. 그러던 1924년 한용단과 미신팀의 주말 결승전 때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우승을 놓치자 흥분한 곽상훈이 일본인 검도사범인 기요다(淸田)와 몸싸움을 벌이자 한인 응원군중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인과 충돌을 빚어 2년간 야구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 서진호·provin@kyeongin.com

 

 

 

'인천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일 선생-지역대표 언론인  (0) 2023.04.01
운석 장면 선생  (0) 2023.04.01
송암 박두성 / 한글점자 창안  (0) 2023.04.01
인천부사 이단상과 아들 이희조  (0) 2023.04.01
서상집,개항기 대부호  (0) 2023.04.01